19 - 노년, 오래된 미래이자 아득한 나의 과거
19 - 노년, 오래된 미래이자 아득한 나의 과거
  • 이동희
  • 승인 2006.05.29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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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정철(鄭澈)(1536~1593)의 훈민가 전문-

 

 훈민가(訓民歌)에 나오는 반백자불부대(班白者不負戴)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늙은 자에게는 짐을 지거나 머리에 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물색없이 경로사상이나 장유유서(長幼有序)식 윤리 교육을 하자고 이시를 들고 나온 것은 아니다.

 아들네 집에 얹혀(?)사는 어느 시어머니가 있다. 홀로된 몸으로 전 생애를 하나뿐인 아들을 키우고 가르쳐서 가정을 이루게 하는 데 주력한 그 어머니는 아들네 집에 거처하는 것이 당연한 처신이요 권리로 여겼다. 시어미를 모시는 며느리가 좀 불편할 것이고 잔소리를 한다한들 좀 고깝게 여기겠지만, 저들을 위한 어미의 심정이니 그래봐야 별 수 있겠느냐며 아들네 집에 눌러 산다. 몸이 편치 않을 때마다 병원에도 데려가고, 적은 액수나마 다달이 용돈도 쥐어주며, 가끔 효도관광이야 외식도 시켜주는 며느리가 기특하다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가 출타한 사이에 며느리의 경대서랍을 열어볼 기회가 생겼다. 눈에 띄는 것이 가계부였다. 시어머니가 보려 해서 본 것이 아니라, 살림솜씨가 짭짤한 며느리가 얼마나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는지 궁금하여 가계부를 열어 보았다. 그런데 낯선 문구가 보였다. 3월 5일: 아들 학원 등록금 10만원, 3월 10일: 웬수 치과 치료 5만원, 3월 15일: 딸 참고서 값 6만원, 4월 1일: 웬수 용돈 10만원, 그 ‘웬수’에게 지출했다는 날들을 기억해 보니 바로 시어미인 자신이 병원에 가고 자신이 용돈을 받은 날이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당사자들이 보낸 편지를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실화라며 들려준 이야기다.

 시내를 좀 벗어난 한적한 길에 시내버스가 지나간다. 보퉁이를 인 한 노파가 손을 든다. 버스 운전수는 설가말까 망설이더니 마지못한 듯 노파를 좀 지나서 급정거를 한다. 무거운 짐을 이고 시내버스를 따라잡아 차에 오르는 노파는 힘겨워 한다. 배차시간이 늦기라도 한 것인지, 백미러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운전수는 조급증으로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간신히 버스에 오른 노파는 보퉁이를 내려놓고 치마를 걷어 올리더니 주머니에서 차비를 찾는다. 한참을 더듬거리던 노파는 겸연쩍은 얼굴로 운전수에게 죄인이 된다. ‘기사양반, 이 늙은 것이 서두라다 보니 차비를 잊고 왔구려. 미안해서 어쩐다요.’ 그렇지 않아도 잔뜩 화가 나 있던 기사가 내뱉는다. ‘늙었으면 집에나 있지 왜 나댕기며 사람을 귀찮게 해요. 차비 없으면 당장 내려욧!’ 노기가 등등하다.

 그때 맨 뒷좌석에 타고 있던 고등학생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1만원 지폐를 요금통에 넣으며 한 마디 되돌려 준다. ‘할머니 차비 여기 있어욧. 나머지는 차비 없는 노인들 요금이요!’ 하더니 뒷자리로 돌아간다. 실화를 전하는 작은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다.

 (머리에 인생의 업을)이고, (어깨에 세상의 짐을)진 늙은이의 짐을 벗겨달라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라고 해서 인생의 업이 가볍고 세상의 짐이 별거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한들 그리 두려울 것 없다’며 당당하게 불륜에 맞서는 젊은이, 의연하게 (오래된 또 다른 나)노인을 대접할 줄 아는 삶의 여유가 왜 그리도 없느냐는 것이다. 늙은 것도 슬프다 하였거늘 상실의 짐, 절망의 아픔을 그 노인들에게 지으려하느냐는 것이다.

 노인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노인은 매우 오래된 나의 미래이자, 아득히 멀기만 한 나의 과거이다. 노인의 모습에서 현재의 내 위상을 찾을 수 없는 사람, 노인의 모습에서 미래의 내 이상을 세울 수 없는 젊은이, 노인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 순수를 회상할 수 없는 자식들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시조 ‘훈민가’ 한 수를 무겁고 조용히 읊조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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