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풍류가 주는 마음의 행복
20. 풍류가 주는 마음의 행복
  • 이동희
  • 승인 2006.06.05 15: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어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숲에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쩌리.

 -정철(鄭澈)(1536~1593)의「장진주사(將進酒辭)」전문

 

  대부분의 사설시조들이 작자를 알 수 없으나, 예외적으로 이 장진주사는 작자가 분명하고 여러 시적 요소들이 결집하여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이 시의 장점은 화자의 서정을 성공적으로 드러내는 시적 어조에서 찾을 수 있다. 장진주사를 읊조리는 화자의 감정은 겉으로는 호탕(豪宕)하고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호기를 부리고 있지만 그의 내면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화자의 감성은 비애에 젖어 있으며 허무와 애수 심지어 적막한 절망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과 삶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낀 자만이 토로할 수 있는 비감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삶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요, 세상의 진면목을 보이는 일이다. 문학예술의 이런 사명으로 볼 때 정철의 장진주사는 예술의 목적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호화롭게 장식된 꽃상여[유소보장(流蘇寶帳)]를 타고 저승으로 돌아가나,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지게에 매여 가나 무에 다르냐는 것이다.

 일단 유기체로서의 생명이 끝난 뒤의 허무와 적막함을 통곡하고 있다. 더구나 그 쓸쓸함과 서글픔이 살아생전 그렇게도 즐겼던 술을 즐길 수 없으므로[뉘 한 잔 먹자 할꼬] 더욱 가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한 잔 술’은 단순히 ‘술 한 잔’에 머물지 않는다. 일단 생명을 다하고 난 뒤의 무상함을 달랠 길 없는 화자의 절절한 서글픔의 반영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침 이슬 같이 허무한 인생, 잠깐 스쳐지나 가는 세상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말고 술에 취해 비몽사몽 살자는 것인가? 표면구조에 감상안을 빼앗기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화자의 이런 표현 속에는 보다 깊은 진정성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화자의 전체적인 어조가 비장하기까지 한 울림을 주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렇게 초로(草露)같은 인생이요 잠깐 지나가는 세상이므로 더욱 이 한 평생을 본질에 투신해야 하며, 그 세상을 세상답게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역설이다. 역설은 언제나 모순형용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진실-진리가 담겨 있는 표현법이 아니던가!

 장진주사의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은 서늘한 주제의식을 감싸고 있는 풍자적인 어법과 멋스런 풍류에 있다. ‘꽃 꺾어 수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우리는 주머니 사정이 허락치 않아서 술 한 잔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옹색한 시대를 살고 있는가? 신용카드의 허용량이 위험 수위에 육박해서 술 한 잔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 집안 식구 눈치 보며 노후대책이 두려워 술 한 잔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현실을 탓하고 있는가?

 그러니 이렇게 신세타령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장진주사의 화자처럼 (돈 대신)꽃으로도 셈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풍류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마신 술을 헤아려서, 주량이 얼마인지 알아서 무엇에 쓸 것인가? 그저 진달래가 피면 봄이겠거니, 울타리에 봉선화 피면 여름이겠거니, 흐드러진 국화가 서리를 맞으면 가을이겠거니, 눈꽃이 온 세상을 덮으면 겨울이겠거니 여유를 가지고 ‘꽃셈’을 한다면 그것이 곧 풍류요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 현대-현대인은 그런 마음의 여유-풍류를 잃어서 행복마저 잃은 것은 아닌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