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불의 계절, 세계를 달구는 월드컵 경기
21. 불의 계절, 세계를 달구는 월드컵 경기
  • 이원희
  • 승인 2006.06.18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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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시즌이다. 온 나라가 붉은 색 천지로 물들었다. 붉은 옷, 붉은 함성, 초여름을 붉게 하는 장미와 붉은 태양,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설레는 붉은 가슴.... 유월은 붉은 색이 지천으로 나부끼는 불의 계절이다.

 원래 ‘?다/붉다’와 ‘?다/밝다’는 명사 ‘불’에서 파생되었다. ‘해(日)’가 ‘희다(白)’로, ‘신(鞋)’에서 ‘신다(履)’로 서술화된 이치다. 재생과 벽사(벽邪)의 신화적 의미의 불. 태워진 모든 것은 죽고, 새로운 불씨로 인해 재생된다. 묵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하는 우주의 질서가 불에 의해 가능하다.

 또한 정화라는 불의 상징성은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두루 발견된다. 그래서 소멸과 정화, 재생과 풍요의 불은 인간과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는 원소이다. 욕망의 집착에 의해 질서가 무질서로 되면 이를 소멸시키고 질서의 세계로 재창조하는 게 바로 불이다. 희랍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세계에 준 것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에 천상의 낙원의식을 알린 거룩한 메시지다. 옛날 중국에서도 계절에 따라 새로운 불(新火)을 지폈다. 우주 질서를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믿음은 붉은 색의 이미지에도 겹쳐진다. 굿을 할 때 황토를 뿌리는 행위랄지, 금줄에 붉은 천을 매다는 것이나, 주목나무로 만든 군대 지휘관의 지휘봉이나 명패를 수호천사인 양 여기는 것도 붉은 색이 삿된 기운을 막아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김동인 소설 중에 ‘광염 소나타’가 있다. 주인공 백성수는 충천하는 아비규환의 화재 장면을 보면서 광폭성과 야성을 느낀다. 그 결과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대로 작곡하는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보인다. ‘불’은 그에게 잠자던 예술적 정열을 일깨워 준 결정적 동인이었다. 이로 보면, 우리나라 축구대표 선수들의 유니폼 색이 붉은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내재된 민족적 저력을 솟구치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붉은 색에서 기인하는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몸에 붉은 것을 두르고 응원하는 함성은 ‘붉은 색’과 ‘불’의 상징의미가 피워내는 억압된 힘의 솟구침이다.

 손바닥 손금처럼, 빤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축구경기는 국민을 열광케 한다. 로제 카이유와는 승패를 가르는 놀이를 아곤(agon)이라 했다. 스포츠는 승패의 놀이라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곤이다. 승리에 대한 기대감, 골을 넣었을 때 터져나오는 희열은 자신과 일상을 망각하는 엑스타시의 순간이다. 기대감이 실현되어 터지는 환호의 순간은 억압되었던 것들이 귀환하는 절정이다. 집단적 도취감에 빠진 카타르시스. 월드컵 경기는 단순히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일상적 자아를 버리고 억압된 자유의지를 불꽃처럼 피워내게 하는, 바로 ‘불’의 제의성이 구현되는 시간이다. 열광케 하는 건 축구경기 자체가 아니라 일상 자아를 잠시 망각케 하는 신화적 시간 경험 때문이다. 억압된 신명이 폭발하는 그 짜릿한 망아의 순간을... 하여, 부정적인 ‘나’의 모습을 불의 기운으로 정화해 새 질서로 재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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