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사회적 임무는 무엇인가. 한 인간으로서 작가의 길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의 주요작 면면을 살펴볼 때 뚜렷하게 나타난다. 시대 이데올로기나 정서를 뛰어넘어 진정성의 세계를 향하는 그의 목소리를 분명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탁류’는 아비를 위해 희생하는 딸의 이야기다. 별반 아비 구실을 하지 못하는 정주사는 그럭저럭 큰 고민없이 딸 초봉을 팔아넘기듯 해서 그의 생활 기반을 도모하고자 한다. 고전소설 심청전을 패러디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옛작품의 재탕이 아니라, 채만식 특유의 소설어법인 풍자를 통해 일그러진 정주사를 꼬집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그의 희곡 ‘심봉사’에서도 확인된다. 심청의 목숨과 맞바꾼 결과가 되어버린 심봉사, 그는 결국 눈을 뜨지만, 심오한 자기회의 끝에 손으로 눈을 후벼 다시 앞 못보는 봉사가 된다. 비록 육신의 눈은 떴지만 마음의 눈이 멀어 딸을 희생시킨 자기과오의 반성이다. 오이디푸스가 근친상간의 패륜을 저지른 뒤 스스로 눈을 멀게 하듯, 채만식은 심봉사를 오이디푸스적 반성의 희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단편 ‘논 이야기’ 역시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 수작이다. 해방이 되어 다들 달떠 있는데 주인공 한생원만은 해방이 달갑지 않다. 시대를 역행한다거나 친일분자라서가 아니라, 일제 때나 해방 이후나 농민들에게서 땅을 뺏아가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생원은 대놓고 중얼거리고 다닌다. 이놈의 나라 다시 해방 전으로 가라고. 농부에게 땅은 무엇인가.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떠나 생존이 걸려있는 화급하고 중요한 것이다. 농토의 무상몰수가 일제나 해방된 뒤나 똑같이 이루어진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농부들의 해방은 되지 않은 셈이기 때문이다.
작가 채만식. 그는 진정성의 세계를 구현한 작가다. 진정성이란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그러나 반드시 있어야 할 그 무엇이다. 물과 공기가 유기체에게 반드시 필요하듯, 인간의 삶에서 진정성은 물이나 공기처럼 세계의 진실이자 세계를 지탱케 하는 뼈다. 채만식은 병든 현실을 가로질러 ‘진정성’의 세계를 이끌어낸 정확한 눈빛을 소유한 작가다. 작가(author)가 진정성(authentic)을 말할 때 작가의 권위(authority)는 발현된다. 그래서 이 세 단어는 하나의 어원(語源)을 가진 가족인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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