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극작가 차범석과 희곡 ‘산불’
24. 극작가 차범석과 희곡 ‘산불’
  • 이원희
  • 승인 2006.07.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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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차범석이 지난 6월에 타계했다. 그는 1955년 ‘밀주’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래 2003년 ‘옥단어!’까지 70여 편의 희곡작품을 발표한 다산 작가이다. 이처럼 많은 작품을 생산한 건 그만큼 치열하고 성실하게 작가의 길을 올곧게 걸어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꾸준히 작품 창작을 하면서 한국연극의 미적 지평 확대를 위해 노력한 작가이자 문화예술계의 어른이었다. 연극과 문화계에서 걸어온 그의 발자취는 이를 말해준다. 한 마디로 그는 연극무대의 삶처럼 강한 파토스를 작품으로 쏟아낸, 한국연극과 문화 발전을 위해 오롯한 정신을 던진 인물이다.


 1962년에 발표된 ‘산불’은 그의 대표작이다. 무대는 소백산맥의 한 외진 마을이다. 이데올로기 충돌전쟁인 6.25가 발발하자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남자 구실을 하는 남정네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을의 아낙들인 점례와 사월은 마을 뒷숲에 숨어들어온 규복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전쟁 상황에서 점례는 규복과 사랑을 하고, 사월은 육체적 욕구를 채운다. 인간의 구체적 삶에서 이데올로기나 정치이념은 무슨 의미로 남는가. 작가는 이데올로기라는 거대담론이 지배하던 전후문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실존적 삶, 본능적인 행위에 초점을 두었다. 리얼리즘 희곡은 생활세계를 무대 위에 재현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무대 현실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현실세계의 문제점을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전후문학으로서 단순히 정치이념에 복속되지 않고 구체적 삶의 모습을 통해 문제현실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산불’은 리얼리즘 희곡의 전형을 보인다. 또한 특정 주인공에 작품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다수 인물들의 개성적 삶과 심리를 묘파했다거나 그들의 일상적인 화법 구사도 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높이는 극적 장치들이다. 그래서 ‘산불’은 해방 이후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한국 근대연극 100년사에서 동랑 유치진과 차범석은 리얼리즘 희곡을 기초하고 완성시킨 대표적인 쌍두마차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일제 현실의 모순구조와 일그러진 제도적 틀을 ‘토막’에서 명징하게 제시한 유치진이나, 전후 시기인 60년대 초반에 인간의 실존적 삶에서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상적 껍데기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차범석의 극작 세계는 모두 문제적인 시대현실에 작가의 눈을 두고 ‘있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수작들이다. ‘산불’은 올 하반기 칠레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과 뮤지컬 ‘갬블러’의 작곡가 에릭 울프슨에 의해 ‘댄싱 새도우’라는 뮤지컬로 개작되어 상연될 예정이다. 극작가 차범석은 하늘의 뜻에 따라 유명을 달리 했지만 그의 불타는 디오니소스적 연극 열정은 하늘나라에서도 그윽한 눈빛으로 지상의 무대를 바라보리라. 해가 진 다음에는 절대로 펜을 들지 않을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극작가 차범석. 이제 그는 도서관과 무대에서 결핍된 현실에서 허기를 느끼는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현실’을 희곡과 연극으로 웅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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