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배를 저어 산으로 가라
25. 배를 저어 산으로 가라
  • 이동희
  • 승인 2006.07.1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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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왜라

 이 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만 하여라.

 

 -장만(張晩,1566~1629)

 

 우리 민족은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농사를 중히 여기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계층의식에도 이런 풍토가 반영되어 사농공상(士農工商)처럼 농사를 두 번째로 중히 여겼다. 장만 시인의 이 작품은 그런 중농의식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될 만하다.

 반도에 산다면 마땅히 범선의 돛이 찢어져라 바람을 받고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야 함에도 아예 그 절대적 수단이 되는 ‘배’를 팔아버렸다. 이는 곧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심과 도전하려는 용기가 부족하다는 반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풍파에 놀란 화자는 배 대신에 ‘말’을 산다. 말을 부리는 일이라고 해서 그리 호락호락한 일일 수 없다. 거센 풍파가 뱃길을 방해한다면, 아흔 아홉 고비 고갯길-양의 창자[九折羊腸]처럼 험난한 길을 말을 몰고 넘어야 한다. 뭍길이라고 해서 거센 풍파의 물길에 결코 못지 않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파(世波)가 아니던가!

 화자는 물길이건 뭍길이건 도무지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생업이 바로 밭갈기-농사다. 줄을 다루어 병기를 만들 줄도 모르고, 배를 다루어 거센 풍파를 넘을 줄도 모르며, 목재를 다듬어 집을 지을 줄도 모르는 백면서생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농사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하여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만 하여라’고 한탄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길을 찾으면서 궁극적으로는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앉아 세상을 관조하려는 의지가 숨어 있기도 한다. 이전투구(泥田鬪狗)하듯 몸과 마음을 가리지 않고 섞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속에서 한 발을 빼려는 도도한 선비의식이 숨어 있기도 하다. 그러자면 ‘밭갈기’는 생계로서의 업(業)이라기보다는, 의식을 전이하는 수단이 되거나, 은둔의 변형이요, 은신의 승화작용이 된다.

 모든 학교-교육이 배를 저어 바다로만 가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모든 스승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넓고 큰 길로만 가라고 제자들을 몰아가지는 않는다. 배를 저어 산으로도 가고, 넓고 큰 길을 버리고 좁고 힘든 길을 선택하라고 가르치는 학교-스승이 있어 시대를 선도하고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청결한 의식과 고귀한 몸을 혼탁한 세속에 섞지 않겠다는 백면서생은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만 해야 한다. 그러나 장래가 구만 리 같은 청소년-한번뿐인 우리 인생마저 그럴 수는 없다. 배를 저어 산으로도 오르고, 말을 몰아 바다로도 달려가야 한다. 꺾어지고 부러지며, 깨어지고 넘어져야 자신의 몸 귀한 줄도 알고 세상 어려운 줄도 안다.

 어찌 청소년뿐이랴. 딸이건 아들이건 하나이기 십상인 요즈음 우리네 가정 풍속도에서도 이런 원칙은 마찬가지다. ‘자식이 귀할수록 멀리 여행을 보내라’던 선인들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대다. 배를 저어 산으로 올라가려는 불굴의 도전정신, 어떤 풍파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용감한 성취동기가 한번뿐인 인생지도를 의미 있는 빛깔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러니, “한번뿐인 인생이여, 배(인생)를 저어 산(세계)으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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