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사색은 스스로 깨닫는 힘이다
26. 사색은 스스로 깨닫는 힘이다
  • 이동희
  • 승인 2006.07.17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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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하노라.

 

 -윤선도(尹善道,1587~1671)

 

  고산은 자연을 하나의 읽을거리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자연이야말로 저작권에 침해 받지 않고 모든 이가 즐길 수 있는 독서 대상이 아니던가! 그 자연을 읽는 도구 역시 자연으로부터 얻었다.

 ‘잔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에는 자신의 사상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세 방면의 꼭지점이 정위치를 이루면서 시적 모티브를 형성한다. 화자가 들고 있는 잔에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전통차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을 것이다.

 산은 멀리 있어 산이다. 임이 멀리 있어야 그리워하며, 그리운 것일수록 소중한 것처럼 멀리 있어야 산이다. 현대 어느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끝없는 사랑의 갈증을 호소하고 있지만, 이 시의 화자는 그렇지 않다. 그리운 것, 소중한 것, 헤아릴 길 없는 깊이와 무게를 지닌 것들은 좀 멀리 떼어놓고 있어야 제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때의 산은 그저 산이 아니다. 이때의 산은 그리움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임에 대한 서정적 형상물일 수도 있다. 이때의 산은 사유의 깊이와 무게만큼 안겨오는 사상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이때의 그리움은 자연의 읽을거리로 채택한 이의 사려 깊은 독서법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산은 사색자의 눈길에서 떨어져 멀리 혼자서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홀로 있는 독서자와 홀로 있는 산이 사로 교감하고 조응하며 세상의 읽는 독법을 만든다.

 임을 만난 반가움보다도 더 큰 반가움. 그리워하던 임이 오신 반가움보다도 더 가슴 떨리게 하는 즐거움. 그것은 바로 ‘스스로 터득한 사상의 발견’이 아니고 무엇이랴! 화자는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오랄 때 오지 않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임. 만나면 시들해지고 헤어지는 순간부터 다시 그리워지는 임. 그런 임을 만난 반가움보다 큰 반가움, 그것은 곧 깨달음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 있으랴! 그런 기쁨이 종장에 집약되어 있다.

 종장의 진술이 심상치 않다. 그 반가운 깨달음이 ‘말씀도 웃음도 없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멀리 있는 산은 화자 자신에게 어떤 방법으로도 어필하지 않는다. 예쁘게 보이고자 없는 웃음도 지어 보이지 않으며, 잘 보이고자 있는 말씀도 비틀어 둘러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런 산이 화자의 포충망에 걸려들었다.

 그 포충망은 그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태연(泰然)하며, 어떤 흉측한 모함으로 쳐둔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약(自若)하며, 그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의연(毅然)할뿐이다. 그런 산을 어찌 반가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말씀도 웃음도 없는 자연의 태연자약함을 사랑하는 맑은 지성이 차 향기처럼 아련하게 어린다.

 세상의 질서로부터 내침을 당하여 20여 년 동안 유배생활, 또 그만한 연륜을 은거(隱居)로 일관했던 고산. 그의 아호처럼 스스로 '고독한 산-孤山‘이 되어 세상을 읽는 독법에 충실했으며, 그런 결과로 얻어진 문학의 유산들이 우리 문학 텃밭을 기름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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