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훈 대법관
이홍훈 대법관
  • 서울=강성주기자
  • 승인 2006.07.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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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흥덕 출신인 이홍훈(60) 법관이 법조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 대법관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30년 동안의 법관 생활에 흠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직자로서 올곧은 마음가짐으로 정도(正道)를 걸어온 자신과의 힘든 싸움이 있었다. 주위의 온갖 유혹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법관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을 굳게 지켜온 것이다. 이 대법관을 만나 대법관이 된 소감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녀온 삶의 철학을 들어봤다.<편집자 주> 

 - 대법관이 된 소감은.

 ▲ 저는 주위 모든 분들의 도움과 성원에 힘입어 대법관에 취임했습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영광입니다. 제 자신의 명예로움보다는 대법관으로서의 막중한 역사적 책임과 사명을 생각할 때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대법관은 중요하고 어려운 자리입니다. 국민의 기대가 커져 더욱 어깨가 무겁습니다.

 - 취임사에서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님이 갈파하신 재판의 요체에 관하여 언급하셨는데...

 ▲ 지난 30년 동안 재판을 해보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법관들이 수 많은 사건을 처리하다보니 직업적인 타성에 젖어 재판에 소홀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건 당사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재판의 신뢰성마저 떨어진게 현실입니다. 사건 당사자들은 평생 한 번 받는 재판이기 때문에 의견을 모두 들어 공평무사하게 판결토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의를 가지고 사건 하나 하나에 정성을 다함은 물론 불편부당하고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공정하게 법을 적용해야 재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사법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제가 서울중앙지법원장 당시 직원들에게 강조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 정부와 환경단체 사이에 심한 갈등을 겪은 새만금사업의 대법원 판결이 한쪽으로 쏠린감이 있는데...

 ▲ 새만금사업의 진행 여부에 대해서는 정부와 환경단체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환경과 개발은 함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자연환경과 인간의 삶이 공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국민이 항상 자연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이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새만금사업도 그런 차원에서 해결돼야 합니다. 새만금사업이 시행 단계에서 논란이 되었다면 끝물막이 공사 과정에서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업은 전북도민들이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는 만큼 재판부에서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해 그런 판결을 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제와 환경을 통합하는 기능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부안 핵폐기장도 갈등보다 사전 조정을 통해 해결했어야 합니다.

 - 법조계 내에서 재야 개혁인사로 인식하고 있고, 특히 소수나 약자들에게 배려를 많이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우리는 6·25 전쟁을 겪은 민족으로 개발과 경제 발전, 공공 유지, 질서 안정에 치우치다보니 개인들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사법부 역할은 국가 체제 유지 차원에서 국민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도 있지만, 사회 질서와 국가체제 유지에 반하지 않는 한 개인기본권은 보장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 지난 6월27일 국회 인사청문특위에서 열린우리당 주호영 의원이 천정배 법무장관과 이 대법관께서 무슨 관계냐고 추궁했었는데...

 ▲ 천 장관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주 의원께서 천 장관과 제가 전향적인 성향인 것을 감안해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런 추궁을 하지 않았나 판단합니다.

 -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 재직시 일조권 판결을 하셨는데...

 ▲ 당시 환경에 대한 법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헌법성 관리에 환경기본정책법이 있습니다. 저는 개발도 중요하지만 환경 역시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조권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판결을 했었습니다.

 - 대법관으로서 앞으로 계획은.

 ▲ 30년 가까이 법관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지켜온 바와 같이 깊은 사색과 고뇌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도록 마음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격무에 시달리는 법관과 직원을 보듬토록 노력하겠습니다. 또 국민의 소리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며, 국민을 섬기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헌법상 최고의 이념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대한 배려에도 깊은 관심을 갖겠습니다.

 -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것과 대법관으로서의 역할은.

 ▲ 현대사회는 모든 변화와 다양한 욕구 및 분쟁을 법이라는 제도의 틀 속에서 수용하여 해결되어야 한다는 법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합리적 이성에 의한 법을 통하여 조화와 균형 및 인류의 공존과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동화적 통합과 시대 정신을 구체적 판결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다만, 제 능력이 부족하여 이러한 막중한 사명을 다할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모든 정성과 열의를 다하여 저에게 부여된 소명과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 나갈 것입이다.

 - 법조계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것은.

  ▲ 요즘 젊은이들은 자유와 물질,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자제하는 수도승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이를 벗어나 수도승 생활도 하여 자기 자신을 자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현실에서 초연하게, 올곧게 살아가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갖지 않으면 (주위의 온갖 유혹에)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 법관 생활 중에 사람 만나는 것을 절제해 오셨는데...

 ▲ 법관 생활을 시작한 이후 고교 동창생들은 물론 대학 친구도 거의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접촉도 가능한 자제해야 할 직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전주 근무를 희망하신 적이 있는데.

 ▲ 1980년 초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할 생각으로 군산지원장을 신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부에서 대전지법 금산지원장으로 발령해 뜻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 대법관 임기를 마친 이후 생활은 어떻게 하실 계획인지.

 ▲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면서 사회 봉사활동을 생각하고 있으나, 자녀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앞으로 5년 후 자녀들이 잘 풀리면 계획대로 공익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 이홍훈 대법관 약력 >

  ▲ 전주북중(1962년)·경기고(1965년)·서울대 법대(1969년) 졸업

  ▲ 제14회 사법시험 합격(1972년)· 제4기 사법연수원 수료(1974년)

  ▲ 육군법무관(1975년)·서울지법 영등포지원 판사(1977년)·서울민사지법 판사(1979년)

  ▲ 대전지법 금산지원장(1981년)·서울형사지법 판사(1983년)·서울고법 판사(1985년)

  ▲ 법원행정처 조사심의관(1987년)·대법원 재판연구관(1989년)·대구지법 김천지원장(1989년)

  ▲ 수원지법 부장판사(1991년)·인천지법 부장판사(1992년)·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1993년)

  ▲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1994년)·수원지법 성남지원장(1995년)·광주고법 부장판사(1996년)

  ▲ 서울고법 부장판사(1998년)·법원 도서관장 겸임(2003년)·서울지법 민사수석부장판사 직대 (2003년)

  ▲ 제주지법원장(2004년)·수원지법원장(2005년)·서울중앙지법원장(2005년)

< 가족 관계 >

  부인 박옥미(59) 여사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첫째 딸은 대학 졸업 후 영상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둘째 딸은 서울대 법학과 박사(환경) 과정, 셋째 아들은 음악 등 연예활동, 넷째 아들은 중앙대 영문학과 재학 중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 채귀례(80) 여사는 고향인 고창 흥덕에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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