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류발전사를 네 단계로 나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네 번째 단계로 과학기술의 시대다. 역사 이전의 단계에서 인간은 이미 언어를 구사했고 도구를 제조했으며 불을 응용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인 고대 문명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는 문자, 농경 및 국가의 조직이 있었지만 아직 정신적 활동은 거의 없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야스퍼스가 명명한 차축시기가 도래한다. 정신발전의 번영이 일어났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출현해 인간의식의 자각을 표현했다. 그리고 난 다음 현재와 같은 과학기술의 시대가 왔다고 한다. 텔레비전은 말할 나위 없이 눈부신 과학기술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정작 텔레비전이 인간의 정신발전을 꾀할 수 있는 문명의 이기인지는 새삼 생각해볼 일이다. 생산과 노동형 인간을 소비와 나태의 인간으로 전락시킨 문명의 검은 이기(利器)는 아닌지. 텔레비전 논리에 무조건 복속시키려는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뉴스나 날씨 정보는 물론 소비 경향과 패션 등 생활과 밀접한 분야들을 텔레비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일들을 실시간으로 접한다. 생활정보와 문화오락, 욕망을 부추기는 상품광고와 더불어 지식과 정보의 획득이 텔레비전을 통해 모두 가능해졌다. 교육, 오락, 소비가 텔레비전이라는 한 공간 안에서 일거에 행할 수 있다. 이러한 순기능으로 텔레비전은 집안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에 위치한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가정 내 중심’으로 존재하는 권력이 되어버렸다.
다채널의 텔레비전은 우리의 뇌기능을 마비시키며 공중성, 획일성, 전체성의 테두리에다 주체를 몰아넣는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 하지만, 광고에 의해 부축이는 소비욕망과, 조장된 스타에 의해 벌어지는 ‘웃기지 않는 해프닝적 프로그램’에 그저 시청자는 자신을 내던진 채 그들과 한몸이 되어 뒹굴며 깔깔댄다. 근대를 열었던 데카르트. 그는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 자아와 세계 그리고 인식과 존재를 엄격하게 분리시켰다. 주체에 의해 규정되고 실현되는 게 세계다. 그러나 근대의 산물인 텔레비전은 주체를 실종시켰고, 세계 속에 주체를 밀어넣는 중세적 도구가 되어버렸다. 스타들의 말씨, 행동, 표정, 의상과 외모 등이 시청자들의 욕망을 욕망하기가 강요되고 있다. 텔레비전의 반미학이다. 세계의 중심에 개인이 있다. ‘나’가 없는 ‘세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텔레비전이 근대정신을 닮아 다시 주체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때 진정 문명의 꽃으로 우리의 삶에 향기를 뿌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