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27.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 이동희
  • 승인 2006.07.31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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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귀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윤선도(尹善道,1587~1671)

 

 인디언들은 친구를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친구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의 영원한 비밀-원초적 슬픔에 대한 깨달음을 공유해야 한다.

 타인-친구의 슬픔을 등에 지는 일은 ‘하늘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는 시지프스의 형벌이다. 시지프스는 바위산 기슭에 있는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는 형벌을 받는다. 시지프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지만 바로 그 순간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시지프스의 형벌은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영겁의 인생 형벌이다. 언제 끝나리라는 기한도 보장도 없는 공간과 시간의 인 생 형벌! 어찌 할 것인가? 이 막막한 인생길을 어찌 할 것인가?

 이때 바로 친구가 필요하다. 영혼의 동반자, 내 슬픔을 등에 짊어진 이가 필요하다. 인식의 공유, 입장의 동일함, 사유의 강물이 교차하는 ‘교우(交友)’로만 가능하다. 우정이 사교나 친목과는 다른 영혼의 교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나의 슬픔을 친구의 등에 떠넘기는 행위가 아니라, 친구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떠안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에머슨)’이다. 그런 우정은 도도한 정감의 자장(磁場)을 형성하여 삶의 내면과 외연에 생의 서기를 띄운다. 참된 우정은 ‘슬픔을 들어 삶의 정수박이에 들이붓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인생의 소중한 축복이다.

 일찍이 고산(孤山)은 그도 저도 싫어서 자연을 벗으로 삼았다. 이들 다섯 친구[五友]는 그냥 익자(益者)만 되지도 않으며, 마냥 손자(損者)가 되지도 않는다. 스스로 친구의 슬픔을 등에 진 사람처럼, 자연의 벗은 그 벗을 알아보는 이의 친구로 남을 뿐이다.

 ‘물[水]’에서 명징한 지혜를 얻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거센 역류의 불운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돌[石]’의 우직한 일관성에서 삶의 진리를 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우둔함에 기가 질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소나무[松]’가 지닌 늘 푸른 기상의 넋을 닮고자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올곧지 못한 비틀림에 싫증내는 사람도 있다. ‘대나무[竹]’의 텅 빈 충만에 매료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나무도 풀도 아닌 정체성 불명에 넌더리는 하는 사람도 있다. ‘만월[月]’은 만월대로 초승에서 그믐으로 인생을 비유로 노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변화무쌍한 변덕에 아예 밤하늘조차 외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자연의 벗은 스스로는 기쁨도 노래하지 않고 슬픔도 울음 울지 않는다. 친구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지고 가는 벗처럼, 자연의 벗은 슬픔도 기쁨도 공유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을 알아보고 그 자연을 벗으로 삼아 스스로 슬픔을 짊어진 시인의 안목에 감탄할 뿐이다.

 그나저나 정담로(鼎談路)를 오르내리며 인생을 문학의 화두로 삼거나, 문학을 인생의 등불로 여기며 산길을 가는 이들의 우정은 무엇인가? 세파 한가운데를 더디게 헤쳐가도 흔들리지 않는 감성의 섬[晩島]처럼, 달빛 어린 강물로 시조가락 읊으며 흘러가는 냇물[月川]처럼, 뭉게뭉게 일어나다 사라지는 구름으로 남길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노을[油然]처럼, 우정은 그렇게 산길을 가듯 쉬엄쉬엄 멈추지 않는 저녁나절의 사랑이거나, 젊은 후회를 만회하려는 등산 과정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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