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무더위를 식히는 소나기 웃음소리
28. 무더위를 식히는 소나기 웃음소리
  • 승인 2006.08.0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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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강에 비 듣는 소리 긔 무엇이 우습관대

 만산 홍록이 휘두르며 웃는고야

 두어라, 춘풍이 몇 날이리 웃을대로 웃어라.

 

 -효종(孝宗.1619~1659)

 시적 모티브를 통해서 독자가 일상적 타성에 자극을 받는 기쁨을 발견했다면, 이는 곧 아름다움-예술미의 추체험이다. 그래서 예술적 아름다움은 깨달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는 이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언어 예술이다.

 ‘청강에 비 듣는 소리 긔 무엇이 우습관대’ 맑은 강물[淸江]에 비가 쏟아진다. 눈을 가리고 강물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의 반향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귀를 막고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솟아오르며 몸짓하는 강물의 군무(群舞)를 보신 적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관람하신 적이 있는가? 시각이 청각을 공유하지 못하거나, 혹은 청각이 시각을 얻지 못했을 때 우리는 하나의 현상으로부터 얼마든지 다른 식별에 이른다.

 이 시에서 맑은 강물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거나 그 빗소리를 듣는 자는 ‘만산 홍록(萬山紅綠)’으로 설정되어 있다. ‘만산 홍록이 휘두르며 웃는고야’는 시적 화자가 우습다고 웃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온 산에 가득한 붉은 꽃이나, 짙푸른 나뭇잎들이라는 설정이다. 그러니까 청강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면서 온 산에 그득한 ‘꽃들과 나뭇잎들’은 제멋대로(휘두르며) 웃고 있다는 것이다.

 청강은 무욕의 자연이다. 맑은 의지로 그냥 흘러가는 존재일 뿐이다. 시적 화자가 객관적 시점을 유지하며 진술하고 있으나, 시적 화자와 가장 닮은 소재를 찾으라면 단연 청강이다. 비의 함축성은 청강을 두드리는 객체다. 그러나 그냥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청강을 질타하며 무수한 소리들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핵심은 그 질타의 소리를 조소(嘲笑)로 식별하는 ‘꽃과 잎-紅綠’의 식별작용에 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때리는 시어머니야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시누이는 그렇지 않다. 말리려면 제대로 말리거나, 그도 아니면서 말리는 척하며 오히려 시어미의 부화를 돋워 더욱 아픈 매를 때리게 하는 시누이의 존재는 얄밉다. 바로 홍록의 식별 작용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홍록이 얼마나 갈 것인가. 겨우 봄바람[春風]이 부는 며칠이 고작 아닌가! 겨우 참새의 날갯짓이거나 하루살이의 호통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비웃음을 견딜만하다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화자는 마침내 종장에 이르러 본심을 토로한다. ‘두어라, 춘풍이 몇 날이리 웃을대로 웃어라.’가 그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열흘 붉은 꽃이 없다)이거나, 인생행락백년(人生行樂百年)이라는 것이다. 청강을 질타하는 비웃음이라 할지라도 어찌 견딜만하지 않겠는가!

 운문을 의미맥락으로만 헤집으면 진부한 산문에 이른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 축보다는 여유 있는 시정신의 멋[風流]과 마음 바탕에 충만한 맛[遊樂]을 음미해야 한다. 한여름, 온누리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보면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웃음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인은 마음 바탕-12처가 온통 풍류와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음이 분명하다. 그 요란한 빗소리를 웃음소리 삼아 이 삼복더위를 이겨본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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