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주인공 엑스트라
진정한 주인공 엑스트라
  • 이세리
  • 승인 2006.08.30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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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겨울의 어느 날. 촬영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얼굴이 낯익은 한 50대 초반쯤의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낸다.

 “요즘은 촬영이 뜸하네? 겨울이라 그런가?”

 갑작스런 질문과 낯은 익지만 누군지 모르겠는 그 분이 당황스러워 건성으로 “네~에” 하고 돌아서는데 “애 좀 써줘. 이렇게 노는 날이 많은 달은 힘들어. 애 좀 써줘”하시며 돌아선다.

 “누구지?” 걸어가는 그 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특별히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촬영장에 갈 때마다 꼭 있던 보조출연진이었다.

 ‘엑스트라’ 로 불리 우는 보조출연. 영화엔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주요직이지만 가장 마지막 서열에 서 있기도 한 그런 자리이다.

 영화촬영을 많이 하기 시작하면서 전라북도에도 보조출연을 업이나 취미로 삼아 나오시는 분들이 꽤나 많다. 어떤 분들은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스텝들에게 현장을 가르쳐 줄 정도로 능숙하기도 할 정도다. 가끔은 누가 스텝이고 누가 보조출연진인지 모를 때가 있을 정도로…….

 또, 재미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노숙생활을 하시 던 한 아저씨는 한 두 번씩 재미삼아 일을 하던 중에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캐릭터가 감독들의 눈에 띄어 정식 단역급 배우가 되기도 했다. 말만 하면 모두가 알만한 영화에 보조출연이 아닌 배우로 타이틀을 올리게 된 것이다.

 필자가 처음 영화를 시작했던 5년 전만 해도 평일에 40~50대의 남성보조출연진을 섭외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굳이 그런 장면을 찍으려면 주말이나 저녁시간을 이용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사이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평일 촬영에도 예전보단 어렵지 않게 아버지 출연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제작진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한편으론 씁씁할 우리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필자에게는 유명배우를 보고 싶어서 혹은 잠깐이지만 화면에 내가 나온다는 특별한 즐거움만 생각하며 보조출연을 하게 해달라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하지만 보조출연이라는 직업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재미난 일만은 아니다.

 의자하나 놓여져 있지 않은 촬영장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출연시간을 위해 한 없이 기다려야 하고, 뜨거운 여름에 사극촬영을 위해 겹겹이 싸이고 바람한 점 통하지 않는 군복이나 한복을 입어야 한다. 또 꽁꽁 여메고 있어도 추운 겨울 날 따뜻한 봄날의 모습을 위해 기꺼이 긴 옷을 벗어야 하기도 하고, 때론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고 난 후 어느 한사람 수건 건네는 사람이 없어 아쉬운 대로 온 몸을 떨어버리고 말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이야기 한다. “그래도 이거라도 해서 애들 학원비도 주고 우리 식구들 먹고도 살어. 이제 내 직업은 엑스트라라니까”라고.

 2005년 전라북도 보조출연인원 약 1만5천여 명. 학비를 위해 뜨거운 태양에 정면도전을 한 젊은 학생들, 병아리 같은 웃음을 지으며 엄마 손을 잡고 배우의 꿈을 꾸며 나온 어린아이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현장이지만 오늘 저녁밥상에 오를 반찬을 생각하며 행복한 엄마들, 추운 겨울 반팔 차림쯤은 가족을 위해 참을 수 있는 아버지들, 유명 배우들에 마냥 설레이기만 한 여고생들, 기다림이 지루하고 힘들어 짜증도 내고 화도 섞어보지만 손자들 사탕값을 위해 긴 밤을 꼬박 세어주는 할머니.

 큰 스크린 속에 당신들의 모습이 스치듯 혹은 뒷모습만 때론 손등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진정한 주인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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