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연시조 40수에 담긴 효의 진정성
33. 연시조 40수에 담긴 효의 진정성
  • 이동희
  • 승인 2006.09.11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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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아라.

 -정인보(鄭寅普.1892~1950?)의

 연시조「자모사(慈母思) 40수 중 12수

 

 연시조 자모사(慈母思) 40수는 위당(爲堂)의 애국자의 지조와 사학자의 면모와 함께 시조문학을 부흥시킨 시인으로서의 품격을 엿볼 수 있다. 하기는 효제충신의 범절을 익히지 않고 어떻게 나라를 걱정하고 겨레붙이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자모사는 위당의 인격과 정신력, 예술혼과 국학정신의 결정체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40 수로 이어지는 연시조 편편이 어머니의 고초를 기억해 내고,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기리는 애절함이 눈물을 짓는다. 간절한 그리움은 돌이킬 수 없는 생사를 넘어 꿈으로 환생하고 생시에도 눈에 어린다. 마치 살아계신 어머니를 대하듯 토로하는 화자의 곡진한 그리움이 도도하게 흘러 눈물강을 이룬다.

 어느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으랴? 그러나 그리움만이 효경은 아니다. 천륜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엽기적 사건이 꼬리를 물고 빈발하는 시대, 부모와 함께 살며 연로하신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이 천연기념물이 되는 시대, 우리는 효도의 참의미를 되짚어 보아야 하겠다. 생활 풍습이 뒤바뀌고, 전통적 가치가 격심하게 혼란을 겪는 현대,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효의 진정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해외 입양아가 성장하여 자기를 낳고, 자기를 버린 부모와 모국을 찾아오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자기를 버린 부모의 처지를 이해하고, 버린 행위를 관용하며, 못다 한 효도를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눈물어린 사연을 접하노라면 현대판 ‘바리공주’(자기를 버린 부모를 위하여 효도를 다한다는 무속신화)’가 먼 설화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가난하며, 지상의 모든 자식은 풍요롭다. 가진 것을 모두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사랑이 부모의 자식 사랑이 아닌가? 그러니 가진 것은 물론이요, 가지지 못한 것까지 주고 싶어 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더 주지 못해)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거지부모는 없는 사랑을 주지 못해 가난하며, 재벌부모는 있는 사랑도 더 주지 못해 가난할 수밖에는 없나보다.

 이에 비해 지상의 모든 자식들은 풍요롭다.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는 것은 부모의 육신마저 먹는 행위가 아닌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없는 것까지 주고 싶어 하는, 머리를 하늘로 두고 있는 지상의 자식들은 그러므로 부자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부모의 사랑마저도 지상의 물질로 저울질하는 천박한 물욕에 눈이 어두워 풍요로운 거지가 될 뿐이다.

 ‘바릿밥(놋쇠 밥그릇의 따뜻한 밥)’은 자식에게 먹이고 자신은 찬밥덩이나 누룽지 숭늉으로 배를 채우시는 어머니. 따뜻한 솜옷은 자식들에게 입히고 자신은 홑적삼 홑치마로 겨울을 나시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에는 그렇게도 좋다하시던 솜치마도 입지 못하시고, 겨우 ‘보공(補空-돌아가신 뒤 관의 빈곳을 채워서 메우는 물건)’이나 되고 마는 어머니의 사랑.

 그러므로 불효(不孝)는 바로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 행위로써 스스로 사람됨을 포기한 비인간적 작태요, 효(孝)는 인과응보적 보은의 행위가 아니라, 천륜을 이어 사람이 되고자하는 당연한 도리일 뿐이다. 어머니! 누가 있어 그 가없는 사랑을 홀대할 수 있으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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