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병기의 난초
34. 이병기의 난초
  • 이동희
  • 승인 2006.09.1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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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 실천학습, 난초경영
 빼어난 가는 줄기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며

 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이병기(李秉岐.1891~1968)의「난초(蘭草) · 4」

 

 가람 선생은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특히 이 작품은 자연소재를 생생한 사실묘사를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조중흥의 선구자로서 ‘가람시조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를 음미하는 포인트는 각박한 현대문명 속에서 방황하면서도 잃어서는 안 될 정신의 지향성과 삶의 자세를 발견하는 데 있다. 가람은 그런 고결한 삶을 예찬하고, 세속에 찌든 정신의 병폐를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난초의 잎이 가늘다는 것이 결코 연약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류에도 스스로 몸을 흔들어 반응하지만 그것은 연약함을 표상하지 않는다. 난초의 잎이 보이는 그런 유연한 자태는 바로 곡선의 형상미가 거센 역풍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자세임을 터득케 하는 자연의 섭리이다. 바로 그런 유연한 자태로서 강렬한 향기를 생산하는 꽃의 비밀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부드러움이 결코 나약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즐겁다.

 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 꽃이 주는 향기를 높이 산다. 물론 난초의 암향(暗香)을 맡을 수 있게 미립(경험에서 얻은 묘한 이치나 요령)이 난 사람이라면 그럴만하다. 그러나 난향이 후각으로 오는 미적 체험이라면 난초의 꽃 대공마다 방울방울 맺혀 있는 이슬을 보는 일은 시각을 후각화하는 공감각적 심미안을 지니지 않고서는 쉽게 짐작할 수 없다. 그 순결하기 이를 데 없는 이슬방울이 가녀린 난초의 몸 어디에 숨어 있다가 저처럼 영롱하게 자태를 드러낸 것일까? 볼수록 신비하며 가까이 할수록 소중하기만 하다.

 하기는 난초뿐만 아니라 사람살이도 그렇다. 항상 물욕에 젖어 살아서야 어찌 난초 끝에 맺힌 이슬 같이, 청빈한 삶이 주는 정갈한 행복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본디 그 마음이 ‘깨끗함’을 즐겨하는 사람이거나, 깨끗한 모래 틈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서도 과욕을 부리지 않는 무욕의 삶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무욕이라면 무소유를 짐작하겠지만, 완전한 빈손-적공(赤空)이 무욕이 아니다.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불필요한 것을 적극적으로 지니지 않으려는 삶이 바로 무욕-무소유의 참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난초야말로 가장 적극적으로 무욕-무소유를 실천하는 자연의 스승이 될 만하다.

 돌이켜 보니 필자가 난초를 곁에 둔지 삽 십여 년이 지났다. 이 시간이 어찌 보면 무욕-무소유를 실습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난초경영을 실제로 하다 보니 물주기를 통해서 갈증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던 삼년, 거름주기를 통해서 비만이 건강의 적신호라는 것을 학습했던 삼년, 햇볕 쪼이기를 통해서 양지만을 골라 앉으려는, 출세주의를 경계하는 지혜를 공부한 삼년, 석삼년이 인생학습의 뜻 깊은 교육과정이었음을 알겠다.

 그것은 곧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으며, 난초를 기른다는 것이 난초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곧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진짜 인생학습이라는 점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난초를 소유가 아니라 관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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