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학 소고(小考)
남성학 소고(小考)
  • 김흥주
  • 승인 2006.09.27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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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를 맞은 가을 캠퍼스에 톡톡 튀는 이색 강의가 학생 사이에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부자학’, ‘대통령학’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귀가 솔깃해지는 관련 강의에는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그중에서도 가족을 전공하는 ‘남성’ 학자인 필자에게 가장 관심 있는 강의는 바로 ‘남성학’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여성의 삶 만큼 고단하기 때문이다.

가끔 TV에 나오는 낙엽이 뒹구는 거리를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남성의 모습을 보면서 ‘고독’의 의미를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고독한 남성’ 이미지는 산업 사회의 남성상이자 남성다움의 신화로 여겨졌다. 고독은 성공의 대가이며 남성의 운명이었다. 일만이 남자를 증명하는 길이며, 성공은 최고의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남성들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리고 여성으로부터 소외당하기 시작하면서 ‘고독’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쓸쓸함, 콤플렉스, 무거운 짐, 강박관념 등이 ‘고독’이라는 이미지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제 더 이상 남성은 외로운 하이에나처럼 성공을 위해 질주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고개 숙인 남자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아니 대다수 남자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경제 침체와 대량 실업사태, 여성의 권익 신장, 자녀의 도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성다움’이라는 환상이 깨지면서 고개 숙여 떨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전화에 상담하면서 흐느끼는 남성의 모습, 귀가공포증에 떨고 있는 남성의 모습, 직장과 가정사이에 끼여 있는 남성의 모습. 이렇게 고독한 남성을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IMF이후 경기가 침체될 때마다 불거지는 남성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해법은 참으로 해괴한 ‘남성ㆍ남편ㆍ아버지의 기살리기 운동’이었다. 요즘의 고독한 남성을 과거의 ‘고독한 영웅’으로 되돌려 보내자는 것인가? 남성을 다시 가장으로, 생계유지자로 강하게 태어나게 하고, 여성을 집에서 얌전하게 가사 일을 책임지게 할 때 사회가 평온하고 경제위기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과거의 대한 향수이며,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의 독선과 편견의 결과이자 변화를 거부하는 거친 몸부림에 불과하다. 이제 한국 남성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다움의 신화를 깨는 일이다. 사회가 강요한 여성다움이 여성의 족쇄이었듯이 강한 남자에 대한 강박감이 남성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어려움을 여성에게, 아내에게 고백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한 사회학자는 "남자는 실패로 인하여 남성다움이 박탈되고, 여자는 성공으로 인해 여성다움이 박탈된다"고 말했다. 남성도 실패할 수 있고, 언제든지 고개 숙일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남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사회적 지원도 필요하다. 복지선진국은 남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되어 양성평등의 가족정책이 활성화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남성은 일, 사회, 가족의 무게를 덜고 여성과 파트너쉽을 이루어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국가와 사회가 전방위적으로 지원할 때 남성들의 자리 찾기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몇 년 전 소설 ?아버지?가 출간됐을 때 우리 사회의 반응은 대단했다. 가장의 권위가 상실된 아버지의 모습을 덧에 걸린 맹수의 고독에 견주어, 덧을 풀어주자는 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덧을 푸는 방식이 아버지의 권위를 되살리는 것이었다는 데 있다. 그러면 아버지의 권위 속에서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아내, 자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가장의 막중한 책임감 속에 죽어 가는 남성의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한 아버지 찾기는 과거의 남성다움의 회복이 아니라 남성도 한 인간이며, 남성다움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지금의 상식이 내일이면 비상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우리의 남편ㆍ아버지는 피곤하고 지쳐 있다. 그러나 앞으로 더욱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은 변화를 생각으로만 받아들일 뿐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있다. 그 동안 믿고 기대어 왔던 가치관을 허물고 출발선에 서서 모색하고 만들어 간다는 두려움 때문에 남성은 오히려 길들여진 현재의 남성다움의 틀 안으로 숨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나약함을, 자신도 강한 남성 콤플렉스에 억압받고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문제를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공동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고독한 영웅은 사라져야 할 시기인 것이다.

(원광대 복지보건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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