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이화우 흩뿌릴 때 외로운 꿈의 여인
32. 이화우 흩뿌릴 때 외로운 꿈의 여인
  • 이원희
  • 승인 2006.10.0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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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문인, 이매창
 매창은 조선조 선조 때 계유년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녀를 계랑(癸娘)이라고도 한다. 계랑은 부안현 아전이던 이탕종의 딸로 어릴 적부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힌 기생(伎生)이었다. 소설가 정비석에 따르면, 기생(妓生)은 원래 기생(伎生)이었다고 한다. 학문을 배우는 학생(學生), 유학을 배우는 유생(儒生)처럼, 재주를 배우고 부리는 사람이 기생(伎生)이다. 그러다가 몸을 팔게 되면서 오늘날 기생(妓生)이라는 용어로 변화되었다. 단어 변천 과정에서 우리는 기생들의 신산스러운 삶의 편린을 짐작할 수 있겠다. 글과 거문고쯤은 넉히 다뤄야 조선시대 선비축에 낄 수 있듯이, 기생 역시 글과 그림 그리고 노래와 춤에 능해야 했다. 보통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와 부안의 이매창을 꼽는다. 이는 그만큼 조선시대 다른 기생들보다 재주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 서, 화에 능하다고 해서 명기가 되는 건 아니었다. 매창과 관련된 일화는 숱하게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허균과의 교류였다.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글월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에 가을빛이 짙어가니, 그대에게 돌아가고픈 생각이 절로 나구려. 그러기에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비웃겠구려.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 만약 조금이라도 응큼한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가까이나 친할 수 있었겠는가. 진회해(秦淮海)를 아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네. 내 언제 이 모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런지. 지면을 대할 때마다 서글퍼지는구려’ 기유년 구월에 쓴 글이다. 허균이 누구던가. 열혈투사이자, 조선시대 방외인을 자처하며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있어야 할 사회를 통렬하게 보여준 교산 허균. 소설과 비평문학사에서 허균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다. 허균 문학의 무거움도 매창의 매화같은 절개에서 나오는 시심에서는 오히려 가볍다. 황해도사 시절, 한양 기생을 별실에 숨기고 즐기다가 파직된 허균이고 보면 그 역시 여색을 좋아한 남아였다. 그런 허균이 매창의 올곧은 마음 앞에서는 어쩌질 못했다. 매창이 조선의 명기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재주에 승하지도 못하고 얇은 구름장처럼 수시로 정분을 바꾸는 여느 기생과는 차원이 다른 매창. 그러기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객이자 호걸 허균도 그녀의 매화같은 서릿발 정절에 사나이의 가슴만 불태웠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육체의 몸부림으로 평가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육신을 부리는 정신의 깊음 혹은 정신의 환함이다. 육체는 정신의 감옥에 불과할 뿐 정신의 부림이 육체의 그림을 만들 따름이다. ‘한 평생 東家食은 배우기 싫어 / 달빛 젖인 매화를 사랑하노라 / 그윽한 내뜻은 저희들 모르고 / 오가며 나의 집 찾아들거니’(가을 2). 외로움이 피어낸 매화의 삶 그것이 매창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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