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시월 상달
34. 시월 상달
  • 이원희
  • 승인 2006.10.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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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상달이다. 지상의 곡식과 과실의 살짐은 더욱 알차고, 꽃들은 저마다의 빛깔로 풍요의 계절을 축복한다. 하늘은 푸르러 높아만 가고 흰 구름은 얇게 져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모양을 바꾸고 있다. 그 아래에서 엷은 바람 몇 올들 저마다 춤추며 만산홍엽의 가을잎을 색칠한다. 이 명징하고 삽상한 계절을 맞아 사람들 마음도 덩달아 넉넉하다. 들녘에는 추수를 기다리는 온갖 생명들이 막바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수런대는 계절, 시월. 이때가 되면 조용히 근원을 생각한다. 하늘과 땅과 바람 그리고 구름과 온갖 생명들... 그 사이에서 인간도 함께 부대끼며 생명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자연과 인간이 한우리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이른바 생태학적 상상력이 시월만큼 크게 작동되는 시절도 없을 듯하다. 추수감사제를 비롯한 온갖 축제와 고사가 상달을 맞이해 집중해 있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월 상달은 우리 겨레가 처음으로 하늘을 연 상서로운 시절이다. 하늘의 환웅과 땅의 웅녀가 만나 거룩한 인간 단군이 탄생하였고 큰 강물은 유구한 세월 속에서 도도히 흘러왔다. 겨레의 시조인 단군이 천상과 지상의 해후로 탄생되었다는 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흐르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 겨레는 천지인 삼재가 조화를 이룬 민족이다. 신화적으로 볼 때, 단군신화처럼 완벽하게 우주적 통일과 조화를 이룬 경우도 드물다. 천상과 지상 그리고 인간을 아우르는 삼재의 원리는 한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모음의 기본자가 되는 ‘ㆍ, ㅡ, l’은 각기 天圓, 地平, 人立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농악에서 징이나 꽹과리같은 쇳소리는 하늘을, 장고와 북의 가죽소리는 땅을, 그리고 신명나게 연주하면서 터져 나오는 사람의 소리는 삼재의 그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언어와 민족놀이인 농악에서 구현되는 단군신화의 천지인 합일사상은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 하늘과 땅의 본디와 이치를 저버리고 인간만이 유일하게 존엄하다는 인간 독존(獨尊) 의식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주범이 되었다. 과학문명에 도취되어 하늘의 음성과 땅의 이치를 눈밖에 두고 오로지 일신의 영화로움을 위해 돌진하는 현대인의 삶. 자신이 영화로운 건 그 밝기만큼의 타인의 어두운 희생이 있음을 알자. 단군신화에서 알 수 있듯, 사람 마음 속에는 이미 하늘이 들어있으니 이에 대한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경외의 시선을 가질 때 곧 하늘의 마음이요 뜻이다. 하늘이 참으로 맑아 서러울 정도로 곱다. 저 쪽빛 투명한 가없는 하늘에 시월 상달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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