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최승범의 가을 잎
39. 최승범의 가을 잎
  • 이동희
  • 승인 2006.10.23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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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열반송(涅槃頌)
 이 철 바람소릴 뉘가 비가(悲歌) 랬느냐

 구십춘광엔 미영털을 벗고, 삼복철 푸른 노래도 마냥 가꿔 불렸다. 한로절 맑은 이슬 물 개어 고루 곱게 풀어놓은 하늘 아래, 내 마지막 색도 놓았거니, 무슨 슬픔 있으랴.

 어느날 바람결에 뚝 진대도 하냥 춤추며 돌아갈 것을…

 -최승범(崔勝範.1931~ )의「가을 잎」전문

 

 불가에선 죽음을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때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죽음을 택하는 방법으로, 좌탈입망(坐脫立亡-앉거나 선채로 열반에 듦)을 선택하는 것은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은 이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전혀 슬픔이 아니며, 감내하지 못할 비극도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진실을 잊고 천 년 만 년 살듯이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려 안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있다. 불교의 가르침이나, 문학작품의 진실을 통해서도 이것을 깨달을 수 없는 중생의 고단한 삶을 어찌 할 것인가?

 그럴 때 고하(古河)선생의 사설시조「가을 잎」을 감상하고 내면화시키는 것도 좋은 인생 공부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평시조의 율격을 과감하게 깨뜨려서 유장한 서술 공간을 확보하고, 그 자리에 삶의 진실을 소리꾼의 목소리로 은유한다. 제재 ‘가을 잎’이 함축하고 있는 주제의식이 낭창거리듯 여유 있게 읽혀 문학적 아취를 풍기는 작품이다.

 화자는 말한다. 사람의 한 세상은 장대한 우주적 시간으로 보자면 그저 ‘한 철’에 지나지 않는다. 이 거세게 흔들어대는 속세의 고통을 중생은 그냥 백팔번뇌라 발음하지만, 내심은 비극적 세계 인식을 불러오는 원인으로 욕망이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인생을 세상의 중심에 심어 놓은 한 그루 나무로 환유하여 바라보는 여유와 멋이 필요하다. 한 인생이 굳건히 뿌리를 내린 채 버티고 서있는 한 그루 나무보다 잘 난 것이 무엇이며, 한 그루 나무가 자기모멸에 울어대는 한 인생보다 못난 것은 또 무엇인가?

 봄빛에 돋아난 연초록 잎들이 미영털을 벗어 가듯이 인생도 그렇게 사춘기를 지나며 성숙해지지 않던가? 노심초사로 지새웠던 한 시절을 지나지 않고 어떻게 인생이 진실의 과실을 거둘 것이며, 어떻게 나무가 그 무거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서있을 수 있었겠는가?

 삼복더위에도 나무들은 푸른 얼굴을 들어 생의 찬가를 깔깔거리며 부르듯이 인생의 청춘과 장년기도 그렇게 삼복무더위와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럴 때 나뭇잎들이 부르는 바람의 노래나, 그럴 때 인생이 부르는 찬가는 당연히 푸르른 희망의 찬양이 아니고 무엇이랴!

 맑은 이슬이 내리는 한로! 조락(凋落)하는 계절 가을이 왔다고, 머지않아 어두운 죽음의 사자 겨울이 올 것이라고 지레 겁먹을 것 없으며, 미리 주눅들 것 없다는 것이다. 그 때 나무들은 또 다른 해탈(解脫)을 위해 좌탈입망을 예비할 것이며, 기꺼이 제 몸을 스스로 비우게 될 것이다. 때맞추어 맑게 가꾸어온 인생은 곱게 물든 자기의 영혼을 바라보며 또 다른 법열(法悅)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정신의 수확, 계절의 진수를 맛보다가 ‘어느날 바람결에 뚝 진대도’ 무엇이 슬프단 말인가? 그대로 돌이 되어도 그만이지만, 한 그루 나무처럼 선 채로[坐脫立亡] 입적하면 그만인 것을, 울기는커녕 ‘하냥 춤추며’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 이 가을, 가뭄으로 시들어버린 단풍잎 대신 화자의 열반송(涅槃頌)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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