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인문학의 위기'를 생각하며
다시 '인문학의 위기'를 생각하며
  • 조한경
  • 승인 2006.11.0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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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The life is short, the art long." 이 말은 서양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B.C 460-377)의 말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이 단언에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단어는 예술이다. 예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음악, 미술 등 예술을 지칭할 수도 있겠으나 히포크라테스가 의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art 의 어원적 의미인 기술, 즉 의술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MA가 인문학 석사 즉 master of Arts의 이니시얼이라는 사실에 근거하면 예술은 인문학이다.

고려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 이후 인문학의 위기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대체적으로 인문학의 위기감은 인문학분야 지원자의 감소, 교양과목의 축소, 취업 전망의 어둠이라는 구체적 세목을 통해 체감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를 우선 외부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순수 인문학에 대한 정부 연구개발(R&D) 투자는 빈약했다. 순수인문학에 대한 투자는 매년 500억원 내외였다. 이 때문에 인문학자들의 정부 프로젝트 선정률도 20%가 채 안됐다. 또 다른 외부적 원인을 찾자면, 요컨대 인문학의 위기는 단독 현상이 아니고 급격한 사회적·기술적 변화의 시기에 발생하는 부수적 현상이다. 위기는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문학사를 보면 프랑스의 많은 인문학자들 또는 문학자들은 가난했고 불행했다. ‘소유언’과 ‘대유언’ 등 유언 시집으로 자신의 불행한 삶을 온몸의 전율로써 표현한 르네상스 시인 비용, 송곳보다 더 날카롭게 세상을 분석하고, 비수보다 더 깊숙이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우화로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고전시대 작가 라퐁텐느,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결국 피해망상으로 비참하고도 불행한 삶을 마감했던 ‘사회계약론’, ‘에밀’, ‘참회록’의 18세기 작가 루소 그리고 드라마 이론을 전개했고, 소설과 드라마를 썼는가 하면, 음악과 철학서를 남겼으니 문자그대로 인문학을 한 몸으로 살다간 디드로는 불쌍한 인문학자들이었다.

얼마 전 전북대 학생들을 상대로 홍세화 씨가 ‘오늘날 대학생의 빈곤한 지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가 강연회에서 우리의 대학생들에게 요구한 것은 독서, 열린 마음의 토론, 견문, 성찰 등 네 가지였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찾아내는 단순한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병폐가 있다. 새로운 정보, 활용 가능한 정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보만을 숭상할 뿐 고전과 사상에 대한 탐구는 기피하는 비인문적 풍토의 대학생들은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어설픈 정보만을 손에 쥔 대학생들은 그래서 당연히 자기만의 편견에 사로잡힌 채 열린 마음의 토론도 불가능하다. 여행을 통한 견문을 해도, 사진 찍기, 기념물 사기 등 자기가 거기를 다녀갔다는 증거만을 수집할 뿐이다. 그런 경우 성찰은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고 한다.

인문학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은 문학, 사학, 철학이다. 그러나 우리 지역 전북대학 인문대학에서 철학과와 사학과는 마이너 학문 중에 마이너 학문으로 전락했다. 예컨대, 한 때 학부제를 강요당했던 전북대학 인문대학의 모든 학과들이 다시 학과제를 회복했음에도 철학과와 사학과는 학부라는 올가미에 묶인 채 그것을 벗어내지 못하고 있다. 실용과 효율이란 미명 아래 모든 것을 돈과 근시안적 성과만으로 재단하는 부박한 시장 논리에 밀려 문, 사, 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이 하나의 학과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문학이 언제 어디서나 존중받고 지켜져야 할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은 기본이다. 말하자면 어떤 밑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학, 농학, 공학 등 실용학문이 온전히 지배하는 세상이 바른 세상은 아닐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우리의 삶이 더 연장된들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문학), 나와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면(역사), 현세와 그 후의 삶에 의문(철학)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일까? 이른바 ‘문·사·철’은 인문학 중에도 ‘학문 중의 학문’이며 외국어를 전공하는 교수도 외국어는 수단일 뿐 궁극적으로 문학과 사학과 철학을 하기 위해 외국어를 하는 것이다.

<전북대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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