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농민 항일항쟁
옥구농민 항일항쟁
  • 이상윤 기자
  • 승인 2006.11.1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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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창지대인 김제와 옥구(현 군산시)지역은 일제치하에서 일본인의 농토수탈로 농민들의 항일의식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옥토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우리 농민들은 소작인에 불과해 소작료에 의지하고 살았다. 군옥지방은 일제시대에 일본인 농장이 특히 많은 지역이었다. 그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이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이다 .1 926년 옥구농민조합 창립을 출발로 서수 농민조합.서수 청년회 등이 발족하면서 일본 농장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착취에 대한 항쟁의식을 키워갔다.

 ▼이 때 설립된 이엽사농장은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75% 현물 납입을 요구하였다. 엄청난 고율의 소작료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45%로 조정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일인농장주는 그들 농민대표를 공갈과 협박을 당했다고 군산경찰에 신고 농민대표 장태성씨를 체포하고 있다.

  ▼군산경찰서로 압송하기위해 림프주재소에 유치되어있다는 소식에 농민들 3백여 명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구금된 장씨를 빼내오고 있다. 또 서수 주재소에도 농민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약200여명의 농민들이 습격하고 있다. 그러자 당시 군산경찰서에서는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농민대표 등 30여 명을 강제로 검거해갔다.

 ▼ 이에 200여 명의 농민들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구금된 농민들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자 경찰은 강제해산을 시키면서 주모자로 80명을 체포 구금하고 온갖 고문을 자행한다.이 가운데 결국 34명이 협박.명예훼손죄.구금자 탈취.소란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있다.

 ▼이 때가 1928년2월29일이었다. 소작료 쟁의로서는 전무후무한 가혹한 판결이었다. 이 농민들의 항일항쟁은 단순한 농장주에 대한 소작쟁의가 아니다. 발단은 소작료에서 비롯되었으나 전국 유일의 조직화된 농민의 항일운동이다. 79년 전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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