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이양하의 수필 ‘나무’의 일부다. 그는 나무를 보면서 이렇게 정의한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라고. 그래서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한편, 바다의 저쪽에서 바라보는 나무에 대한 시선은 어떤가. 독일의 지성 헤르만 헤세는 ‘나무는 교의나 규율을 말하지 않고 개별적인 것을 넘어 삶의 근본법칙을 들려준다.’고 하였다.’ 바다의 동서를 막론하고 나무는 우리에게 범상한 사물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보면, 서구의 사상적 전통을 수목형(트리) 모델로 규정하고 있다. 나무의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가 뻗어 나오고, 가지에서 다시 작은 가지가 생긴다. 나무의 형태처럼 서구의 철학을 비롯, 인간 사고와 사회조직이 만들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나무는 교과서다. 아니 하나의 철학서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근간이 되는 문명적 사유의 출발이 자연에서 나왔다는 건 이미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지만 나무야말로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룩하는데 필요한 상상력의 원천이다.
가을이 깊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눈을 즐겁게 하는 울긋불긋한 단풍의 채색 구경도 즐겁겠지만, 나무가 들려주는 말없는 언어에 귀를 귀울려보자. 단풍 아래서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마음 속에 나무의 소리를 담아오는 것도 좋으리라. 뿌리이자 줄기이고 줄기이자 뿌리인 나무의 리좀. 현대사회는 바로 이런 리좀적 사고가 필요하다. 고정된 체계나 구조가 없고 중심이 없을 뿐 아니라 비위계적이며 어떤 궁극적 근원이 아닌 다원성을 보이는 사회. 차이를 인정하고 다차원성을 지향하는 열린 사회이다. 다시 나무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