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작자.연대 미상 사설시조
42. 작자.연대 미상 사설시조
  • 이동희
  • 승인 2006.11.1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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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식자우환이 주는 웃음의 미학
 댁들에 동난지이 사오, 져 쟝스야, 네 황후 긔 무서시라 웨난다, 사쟈

 외골내육(外骨內肉) 양목(兩目)이 상천(上天), 전행(前行) 후행(後行), 소(小)아리 팔족(八足) 대(大)아리 이족(二足), 청장(淸醬) 아스슥하는 동난지이 사오.

 쟝스야 하 거복이 웨지말고 게젓이라 하렴은.

 -작자·연대 미상(사설시조)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섣불리 알았다가는 반식자우환(半識者憂患) 꼴이 된다. ‘춘향전’에 한양의 이몽룡에게 보내는 춘향의 내간을 가지고 가던 방자가 마침 거지꼴로 변색을 하고 남원골로 내려오던 이도령을 길에서 만난다. 이도령이 방자가 소지한 서찰을 보자고 하나, 방자가 남의 내간을 보려고 하느냐며 핀잔을 준다. 그러자 이도령이 방자를 설득하며 ‘行人臨發又開封(행인임발우개봉)’이라는 말도 있다며 보기를 강요하자 그만 방자는 ‘그 양반 행색은 처참하지만 문자속은 기특하다’며 서찰을 보여준다.

 무식한 방자에게 조차 앎에 대한 경외심이 사무쳐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행인임발우개봉’은 장적(張籍)이라는 사람이 지은 ‘추사(秋思)’라는 칠언절구 한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객지를 떠돌던 화자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고향으로 가는 나그네를 만나서 급히 몇 자 안부를 적어 보내며 할 말을 제대로 다 하기는 한 것인지 행인이 길 떠날 무렵에 다시 자신의 편지를 열어본다는 뜻이다.

 이것을 방자는 행인이면 누구나 남의 서찰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 소중한 내간을 보여주고 만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춘향에게는 목숨을 건질 수 있는 행운을 얻었으나, 암행을 숨기려는 어사로 하여 방자는 자신을 가두어 두라는 어사의 서찰을 가지고 스스로 옥살이를 하러 떠나는 꼴이 되었으니, 반식자우환도 이런 우환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런 점에서 이 시의 화자인 게젖 장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유식을 자랑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상품인 게젖을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라면 유식한 체 문자속을 떠벌릴 일이 아니다.

 이 시조는 ‘게젖’이란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한자로 외치는 게젖 장수를 빈정대고 있다. 이것은 오직 한문만을 뽐내는 사대부 계층을 은근히 풍자한 것이다. 사설시조의 서사적 가변성을 살려 대화체의 형식에다가 재담과 익살맞은 표현, 그리고 상거래의 내용을 보여 준 점이 특이하다.

 초장에 보인 대화체 구성형식은 매우 신선하다. 시적 대상인 게젖 장수와 시적 화자가 스스로 벌이는 대화에 이 작품의 어조가 잘 묻어나 있다. 그보다 절정인 것은 중장에 있다. <껍데기는 딱딱하고, 속에는 살이 있으며, 두 눈은 하늘을 향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작은 다리 8개, 큰 다리 2개, (씹으면) 청장이 아스슥하는 동난지이 사오> 아니리 같은 변주와 ‘아스슥하는’과 같은 감각적 표현은 실감을 더해 주어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현학적(衒學的) 취미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한학자에 대한 풍자는 종장에서 마무리 된다. 양반의 비굴성이랄까? 아니면 대중의 삶에서 벗어나 있는, 양반이 지닌 앎의 허구성이랄까? 화자는 게젖 장수에게 호통하지만, 그 호통이 향하는 곳은 정작 양반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작품이 해학적 통쾌미가 있으며, 그래서 이 작품의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들어낼 수 없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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