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언론이 바로서야
46. 언론이 바로서야
  • 이동희
  • 승인 2006.12.1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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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 불개미, 잔등 부러진 불개미, 앞발에 피부병 나고 뒷발에 종기 난 불개미

 광릉 샘고개를 넘어 들어가 호랑이의 허리를 가로 물어 추켜들고 북해(北海)를 건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임아, 임아, 모든 사람이 백 가지 말을 하여도 임이 알아서 짐작하소서.

 -작자·연대 미상(사설시조)

 

 『청구영언』이 전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의 모함에 대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고 진실을 바로 새겨 들어달라는 화자의 하소연이 세월의 앞뒤를 두고서도 절절하다.

 뭇사람들이 전혀 근거도 없이 남을 모함하는 것이 하도 얼토당토하지 않아서 이를 희화화(??化)하되, 그 풍자의 소재로 개미를 등장시킨 점이 재밌다. 사물 중에서 극히 작은 것을 비유할 때와 작되 많은 수를 들어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개미가 아닌가.

 사람에 의한 상처는 주먹질 발길질로만 생기지는 않는다. 그런 상처는 시간이 약이다. 세월이 가면 아물고 봉합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으로 입는 마음의 상처, 내상이 문제다. 하찮은 개미, 더 이상 작을 수 없는 불개미, 심지어 잔등 부러지고 앞발에 피부병 나고 뒷발에는 종기까지 난 불개미는 더 이상 비유할 것도 없는 미물이다. 상처 입은 미물, 사람들의 입방에 올라 상처투성이가 된 사람의 모습이 미물 개미로 전락되었다.

 과장법을 사용하여 허무맹랑함을 드러내고 있는 중장에 이르면 이 시의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 것은 예수의 지적이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口是禍之門 舌是斬自刀)’이라고 노래 한 이는 당나라 명재상인 풍도(馮道)였다. 사람을 상하게 하는 흉기로 사람의 ‘말’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로 인하여 상처를 입으면서도, 자신의 말로 인해 상처 주는 일을 경계하는 데 소홀하다. 말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치명적인 자상을 입힌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불가의 법구경에는 이런 말도 있다. ‘아무리 말을 꾸며 남을 헤쳐도 죄 없는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나니, 바람 앞에 흩어지는 티끌과 같이 재앙은 도리어 자기를 더럽힌다.(加惡誣罔人 淸白猶不汚 愚殃反自及 如塵逆風?)’

 ‘광릉 샘고개를 넘어 들어가 호랑이의 허리를 가로 물어 추켜들고 북해(北海)를 건넜다는 말’이 허무맹랑할지라도 믿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사란 말인가? 그래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전래 속담에 더해서 ‘개미와 코끼리의 씨름’ 같은 현대판 허무 개그가 유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듣는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여도 듣는 사람이 제대로 들으면 그만이지만, 듣는 사람의 청력도 의심스럽고, 더구나 결정적 권력을 지닌 사람이 잘못 듣는 경우는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당하고 만다. 중국 고사에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빠른 마차로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입이 가벼운 것도 타고난 천성이라지만, 가볍게 말하는 사람이나, 그 가벼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의 인격적 신뢰도는 꽝이다.

 그나저나 현대판 말의 광장인 언론이 바로 서지 않음으로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이 혼란을 어찌할 것인가?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언론의 자유’가 ‘언론사의 자유’로 치환된 착시를 당연시하는 이 어지러움을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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