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동지, 겨울의 절정에 서다
42. 동지, 겨울의 절정에 서다
  • 이원희
  • 승인 2006.12.2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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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이 동지였다.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동지는 겨울의 절정이다. 겨울 절후 가운데 맨 중앙에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지는 겨울의 대명사이다. ‘동짓달 서리까마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등은 딱 동짓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한겨울을 의미한다. 동지가 일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점에 착안한 황진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해후를 위해 동짓밤을 요리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님오신 밤이여드란 구뷔구뷔 펴리라’ 우리말을 맛깔스럽게 빚어낸 언어적 미장도 그러거니와, 시적 표현도 상당한 수준을 보인다. 동짓날 한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복판에 있는 깊고 깊은 밤을 무를 자르듯 잘라서 이불 속에다 넣어두었다가 임이 오는 밤이 되면 곱게 접어둔 동짓밤을 펼쳐 긴긴 사랑을 풀어내겠다는 발상은 웬만한 시적 의취를 갖지 않고서는 넘볼 수 없는 경지다.


 원래 농삿일과 관계가 있는 24절기.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은 천기의 조건에 따라야 한다. 동지는 한 해의 끝머리인 섣달 마지막에 있는 절기다. 이 날은 팥죽을 쑤어 먹는다. 팥이라는 온식품을 섭취해 몸을 덥게 하는 의도도 있지만 벽사진경의 주술적 의미가 더 크다. 한 해를 보내는 세밑자리에서 다가오는 새해도 삿된 기운이 얼씬하지 않도록 염원하는 마음에서 팥죽을 나누어 먹고 집안 곳곳에 뿌린다. 붉은 색이 잡신을 물리친다는 속신 때문이다. 이로 보면 팥죽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이하려는 주술적 도구이자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정보화 사회다. 한겨울에도 반팔차림으로 컴퓨터를 하루 종일 구구다보면서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한다. 그래서 절기는 단순히 점심이나 저녁 식사의 특별 메뉴가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고 만다. 하기야 실내위주의 생활을 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늘 아래 사는 이상 천기와 지기의 오묘한 작용을 무시할 순 없다. 머리는 하늘을 이고, 발은 땅을 딛고 있으니 하늘과 땅에 의지할 수밖에 없잖은가. 천지간의 대화에 귀를 대보자. 동짓날 푸른 쪽달이 걸린 밤하늘은 많은 생각을 자라게 한다. 그래서 테크노 유포리아에 빠져있는 현대인일수록 절기의 의미를 새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치미 한 그릇에 팥죽 한 사발은 아니더라도 동짓날의 살가운 풍경을 보여주는 시 한 수로 동지 분위기에 빠져봄이 어떨가. ‘양력 멩질이나 해서 가렴/이렇게 날두 춥구 한데//야 새아가/그 왜 찹쌀 있디 왜/ 닛찹쌀 가루루/몽이나 비자라//동지가 낼인데/죽이나 쑤령//달구지 바꾸는/눈길을 굴러간다/ 달가당 쌍강 빼각/눈길을 굴러간다/땅버들 냉기엔 까치가 짖는데/새색씨 똬리엔 어럼이 엘린다//벳낱가리 높구 우물 깊은 동네/눈 덮인 초가집 굴뚝에서는//동지죽 쑤는 연기가 쿠울 쿨/자꾸 올라간다’(양명문,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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