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삼십대 X세대를 위한 변명
모순의 삼십대 X세대를 위한 변명
  • 김경아
  • 승인 2007.01.19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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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도여행에서 돌아왔다. 사실은 ‘살아남은 자를 위한 숨쉬기’라고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살아남아서 유명TV드라마 작가, PD, 컨설팅회사 CEO, 교수, 헤드헌터, 한의사, 로펌변호사가 되었다면 남들은 비웃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20대를 지나서 삼십의 중간까지 견뎌왔다. 낮선 도시 서울공화국에서 20대에 만나서 인생의 한 걸음을 내딛는 30대까지를 함께 견뎌온 선후배이자 동지들의 십년만의 여행이었다.

여행을 떠난 우리들은 1970년대에 태어나고 1990년대에 20대를 맞이한 이들이다. 우리들의 20대는 모래시계의 여주인공이 겪은 극적인 시대상황도 없었고, 그렇다고 요즘 2000년대 학번들처럼 모든 것이 똑소리 나는 여권신장의 사회도 아니었다. 90년대 학번인 우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온 덕분에 X세대 또는 신세대로 불리웠으나, 가치관은 아직 80년대의 분위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던 세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스스로를 우스게 소리로 “창밖의 여자도 아니고 창안의 여자도 아닌 창에 낀 세대”라고 한다.

그런 우리들이 이젠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이 되었다. 살아보니 이 나이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으며 인생을 판가름 해버릴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조금은 힘든 나이이더라. 이쯤 나이가 되면, 젊다고 설쳐대기에는 조금은 세상물정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기에 조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쯤 나이가 되어도, 도덕교과서와 달리 돌아가는 세상의 법칙에 조금은 반기를 들어볼 정열과 패기가 아직은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낀세대가 되어버렸나 보다.

지금 대한민국의 허리역할을 해내는 386세대들이 우리나이였던 10년 전엔, 1997년 외환위기와 대선이라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렇기에 기존 정치세대를 대체해낼 젊고 패기 있는 386세대의 등장은 극적이고 드라마틱했다.

그러나 30대인 X세대들의 등장은 조용하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조금은 솔직하고 속세적이다. 그러면서도 가치판단은 이중적이다. X세대들의 관심과 수다는 나라의 미래나 정치적 견해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가족의 구성이다. 보이지도 않는 감정보다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과 지표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편하다. 속물적인 스스로를 쿨하다고 거침없이 말하며 꽤나 만족스러워 한다.

돈과 부에 대해서도 솔직하면서도 이중적이다. 돈은 필요악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필수요소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끔은 가치관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대화가 아파트 가격상승, 사회적 성공, 외모처럼 너무나 현상적인 것 그 자체에 한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30대 중반에 부동산투기 한번 못하고 죽어라 회사일에 치여 살았던 우리가 부동산재테크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 되는 상황은 천박하다고 비난한다. 부유함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불공평에 대해서 비판적이면서도, 기꺼이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이 이젠 익숙하기 까지 하다.

사랑도 솔직하면서도 이중적이다. 지나가버린 사랑에 대해 가슴미어지는 아픔일랑 발라드 가사에서나 들을법한 일이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미치도록 좋아했던 마음이 어느 한 사람이라도 식으면 미련없이 끝내버려야 쿨하다고 하는 시대이다. 그러면서도 쿨한 사랑을 당하기는 싫어하며, TV드라마의 변종 신데렐라들에 열광하는 자기모순은 더 커진 것 같다.

우리들이 쏟아낸 우리세대의 모습은 이렇게 개인주의적이고 모순적이었다. 36시간이 꼬박 넘는 수다 속에서 한때는 X세대였던 우리들의 삼십대가 스스로 안쓰러워졌다. 우리들을 위한 변명은 있었다. 그래도 모든 면에서 조금은 자연스러워지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조금은 관념과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와지지 않았느냐고.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이란 어쩌면 가장 모순적인 이중성 그 자체 아니겠냐고. 과연 그런 것일까?

남도의 들녘에 비추는 석양은 사진처럼 멋지지 않았지만, 자연스러워서 좋았다. 자연은 멋져서 좋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서 좋은 것 같다. 기대에 못 미칠 때도 있고 상상초월의 멋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담담할 수 있어서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서른이 넘은 우리들은 신세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쿨하려고 기를 쓸 필요도 없고, 속물적인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지나치게 변명하려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어울릴 수 있도록 지극히 담담하며 지극히 솔직하면 좋은 것 아닐까. 가끔은 초라해도 본질만은 변치 않으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아도 좋지 않을까?

<호남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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