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탄생기의 정신을 ‘3.1 문화운동’으로
한국 영화 탄생기의 정신을 ‘3.1 문화운동’으로
  • 장병수
  • 승인 2007.02.22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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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12월 27일 프랑스 그랑 카페에서 탄생한 영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1897년부터 ‘영미연초회사’가 자사의 담배를 홍보하기 위하여 유럽의 활동사진을 상영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입장료로 빈 담배갑을 받았는데, 한 개에서 열 개까지 치솟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활동사진에 대한 문헌상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1903년 6월 23일자‘황성신문’에 실린 한성전기회사의 활동사진 상영광고이다. 이 활동사진 역시 자사의 전차 홍보를 위해서 상영했다고 한다. 이 광고에 따르면 입장료는 당시 설렁탕 한 그릇 값에 해당하는 십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하루 100원을 넘기는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07년 최초의 활동사진 전문 상영관인 단성사(團成社)가 개관되었다. 1910년대 접어들면서 단성사에서 외국의 무성영화, 즉 ‘대열차강도’(1903), ‘쿼바디스’(1911) 등이 상영되어 인기를 누리게 되자, 장안사나 연흥사와 같은 활동사진 흥행상설관이 건립되어 무성영화의 흥행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화의 배급과 상영은 거의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 졌다.

 한국 영화의 탄생 시점은 공교롭게도 3.1 운동이 발생한 해인 1919년 10월 27일로 단성사에서 상영된 김도산의 ‘의리적 구투’를 기준으로 할 수 있다. 영화는 악랄한 계모와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찾으려는 전실 아들 간의 다툼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28막 3장의 연쇄극 중 야외 장면을 위해 약 10분 정도로 촬영된 것이다. 이 필름은 연극공연 중에 스크린을 치고 영사되었는데, 일종의 ‘키노 드라마 Kino-Drama’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참고적으로 키노 드라마란 무대에서 연극을 공연하면서 무대에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장면을 필름으로 찍어서 무대 위의 스크린에 상영하는 것이다. 즉 무대 위의 실연과 스크린의 화면을 번갈아가며 보는, 일종의 연극과 영화의 합성물이다. 어찌 보면 ‘의리적 구투’는 김도산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지만,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미야카와가 실행한 관계로 진정한 우리 영화라고 보기 힘든 면도 있다. 하지만 현재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영화의 날은 10월 27일로 정해져 있다.

 일본 영화가 가부끼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우리나라의 초기 영화는 신파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극영화로서 최초의 한국 무성영화는 1923년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세’이다. 35밀리 3권으로 된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의 지원 하에서 제작된 저축을 장려하기 위한 홍보 영화로 전국에 무료 상영되었다. 이때를 시작으로 극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 및 상영되기 시작했으며, 1923년 12월에 첫 개봉된 ‘춘향전’은 1996년까지 무려 열세편이 제작되었다. 극영화는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과 같은 우리의 고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1925년 이광수의 소설을 최초로 영화화한 ‘개척자’도 제작되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이십 오만 명 정도였는데, 서울에만 12개, 부산에 3개, 대구에 4개 그리고 평양에 3개의 극장이 있었다. 또한 무성영화시기에는 배우나 감독보다도 해설자 역할을 하는 변사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 때문에 변사의 인기가 배우나 감독보다 높았으며, 심지어 변사가 영화를 직접선택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무성 영화의 백미이자 우리나라 초기 영화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은 나운규 감독이다. 그는 윤백남의 ‘운영전’에서 단역 배우로 데뷔해 민족의 영화 ‘아리랑’(1926)으로 화려하게 만개했다. 이 영화는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아 조국을 잃은 백성들의 울분과 설움 그리고 항일정신을 상징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전 국민의 호응은 열렬했으며 주제가 ‘아리랑’과 함께 민족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로 민족 영화의 탄생이요, 영화 감독 나운규가 등장한 것이다. 그 밖의 중요 무성영화로는 조선인의 비애와 저항의식을 다룬 ‘임자없는 나룻배’(이규환, 1932), ‘먼동이 틀때’(심훈, 1927) 그리고 ‘인생항로’(안종화, 1937) 등이 있다.

 1919년은 3.1운동이 발발한 해이자, 한국영화가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영화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게 한 나운규 감독을 배출했다. 곧 3.1절이 다가온다. 최근 각종 매체를 타고 무차별적으로 밀려오는 일본 문화를 비롯한 외국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 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계승 발전시키고, 지속적인 인재 육성에도 아낌없는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번 3.1절을 계기로 우리 문화 제자리 찾기 운동과 우리 문화 지킴이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3.1 문화운동’이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기를 기대해 본다.

(영화평론가/원광대학교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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