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마는 달리고 싶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 김윤태
  • 승인 2007.05.1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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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년 만에 처음으로 개통되는 남북의 열차가 5월 17일 경의선과 동해선의 군사분계선을 통과한다. 정부는 시범운행 뒤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오가는 열차의 단계적 운행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1998년부터 시작된 금강산관광이 군사분계선을 피해 선박으로 이용하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살얼음을 딛듯이 조심스럽게 시작했던 남북교류는 어느덧 개성공단을 건설하고 이제는 철도개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 한반도에도 냉전이 눈이 녹고 화해의 봄이 오려는가?

 한반도는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냉전의 대결장이다. 아직도 남북교류와 협력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들의 의견이 갈려있다. 보수와 진보는 경제정책과 사회정책보다 대북정책에 대한 시각 차이로 끝없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새로 열었던 진보세력의 공은 부정할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라는 비전과 6.15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계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남북교류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남북협력이 발전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하기 위해서는 보수세력의 지지도 필요하다. 이는 냉전체제에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독일통일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동독과 서독은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냉전체제의 첨병으로써 심각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서독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서독의 초대 총리 아데나워는 서독의 안보는 서유럽 민주국가에 굳게 결속될 때에만 보장된다고 생각하고, 이에 기초한 ‘힘의 정치’를 추진하였다. 1955년 아데나워는 “동독과 외교를 맺는 나라와는 일절 외교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발표했다.

 1969년 10월 21일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서독의 외교에 새 바람이 불었다. 브란트는 아데나워와 달리 동유럽의 공산진영과 수교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동유럽에 접근했다.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서 긴장완화에 일조했다. 그러다 1974년 갑자기 브란트 총리의 보좌관 귄터 기욤이 동독 비밀정보기관 슈타지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독일이 발칵 뒤집어졌다. 결국 브란트는 책임을 지고 중도하차했다.

 브란트가 물러난 후에도 동방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한스 디트리히겐셔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만년 소수당인 자유민주당 소속이지만 무려 18년간이나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의 외교적 작품은 1975년의 헬싱키 협정이다. 회담에는 유럽 35개국이 참가해, ‘상호간의 국경 존중’ 등 10개 원칙을 중심으로 한 안전보장과 4개의 의제를 담은 문서에 서명했다. 겐셔는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도, “독일 민족은 통일 요구와 함께 자유로운 자결권을 갖는다”는 서독의 정치적 목표를 고수해, 헬싱키 협정에 “국경의 평화적인 변경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들어가도록 했다. 즉, 동서독 양측이 원한다면 국경선을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련은 처음에는 격렬히 반대했으나, 나중에는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동의했다.

 헬싱키 협정은 독일 통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서독 사이에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민족적 연대감과 동질성이 강화되고, 정부 간 대화도 증가했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이해하고 연대감을 갖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동독과 서독은 통일 전에 600만 명이 서로 방문했다.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동독의 인권 개선을 요구했다. 서독은 동독의 망명자를 받아들였으며, 서로 파견한 간첩을 교환하기도 했다. 동독도 서독과 교류를 통해 동독의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 지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서독의 통일은 서독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사회민주당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자유민주당의 겐셔 외무장관과 기독교민주당의 콜 총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만약 동서 진영이 대화를 거부한 채 계속 군비경쟁만 했다면 어떤 결과가 왔을까? 독일의 브란트와 겐셔 같은 지도자들이 미래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동방정책과 헬싱키 협정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독일의 재통일도 냉전의 붕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냉전의 붕괴가 아니라 핵전쟁으로 인한 ‘세계의 붕괴’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건양대학교 사회학 교수, ‘한국의 전망’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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