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러(2)
오일러(2)
  • 김인수
  • 승인 2007.05.17 15: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주에 다하지 못한 오일러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좀 더 할 이야기가 있어 몇 가지를 기술하기로 한다.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수학자로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했다. 오일러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그 역시 수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오일러가 교회에 들어오기를 원했지만 오일러는 수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바젤대학의 신학부에 입학하였지만 수학을 전공한다. 그곳에서 오일러는 스위스 수학자 베르누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출중한 학생이었다. 베르누이는 오일러의 아버지를 설득해, 오일러의 전공을 신학에서 수학으로 바꾸는데 기여한 사람이다.

 오일러는 1724년 열일곱의 나이로 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바젤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일러는 1727년 러시아 황제로부터 초청을 받고 러시아로 가게 된다. 1730년 성 페테르부르 (레닌그라드의 옛 지명) 아카데미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는데 1733년에는 수학교수로 자리를 굳혔다. 이후 러시아 황제 안나 이바노바가 1740년 숨질 때까지 오일러는 러시아에서 줄곧 수학연구 활동을 했다.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긴 오일러는 1741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의 수학교수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1766년 러시아의 황제인 캐서린 여제의 부름을 받고 다시 성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다. 러시아에서 여생을 보냈을 정도로 고향인 스위스보다는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했다. 러시아가 스위스보다 훨씬 학문탐구에 좋은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오일러는 수학과 물리학의 천재적 거두였다. 그는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숱한 업적을 남겼으며 수학에 있어 대수와 확률론의 기초를 다지는데 공헌했고 미적분학과 정수론, 기하학 등 방대한 분야에 걸쳐 손길을 뻗쳤다. 특히 기하분야에 여러 가지 논제를 제기했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완성체 라는 개념에 숨은 수학에 대해 탐구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완성체가 정다면체 형태로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정다면체에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면체, 정이십면체 등 다섯 개만이 존재한다. 이 개념들은 르네상스 때까지 잊혀졌다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파치올리에 의해 다시 연구됐다. 케플러는 완성체를 행성궤도와 연결 지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현대 해석기하의 많은 내용들이 오일러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업적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한수열에 관한 이론도 전개했고 삼각함수론의 기반도 제공했다. 일생동안 5백여 권의 책과 논문들을 출판했는데도 사후에도 4백여 권의 책이 출판됐다. 그 중 ‘무한소해석입문(1748)’은 순수해석학의 기본서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1755년 출판된 미분학으로 이어진 해석학 시리즈는 ‘적분학(1768∼70)’ 세 권의 출판으로 완결됐다. 감마함수나 베타함수는 오일러가 만들어낸 유명한 함수로 그 내용이 해석학 시리즈에 담겨있다. 스승인 베르누이가 제기했던 측지선에 관한 오일러의 대략적인 아이디어는 ‘곡선의 최대최소정리(1744)’에 실렸다. 1770년에는 대수분야 책인 ‘대수입문’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디오판토스 대수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중 일부에 대한 해답도 실려 있다.

 대부분의 업적이 순수수학과 관련됐음에도 불구하고 오일러는 천문학이나 물리학 등 다른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역학의 기초를 다지기도 한 그는 '운동원리' 개념을 소개하고 강체운동을 처음으로 설명해냈고 행성과 혜성의 운동도 분석했다. 한편 광학에도 흥미를 가졌던 오일러는 1770년에서 71년 사이 ‘굴절광학’이라는 제목의 세권의 시리즈를 출판한다.

 게다가 물리학의 기반업적과 수학 철학의 기본원리에 대해서도 집필했다.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긴 오일러는 과학 분야 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베를린 시절 철학적 논쟁에 곧잘 관여했던 그는 특히 볼테르와의 논쟁을 즐겼다. 불행하게도 철학적 능력의 한계로 가끔씩 오류를 범해 좌중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복수의 기회를 갖게 됐다. 캐서린 여제의 궁에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가 초대됐다. 자신의 통치령을 무신론으로 개종하려 했던 캐서린에 반 디드로의 논쟁에 염증을 느낀 케서린 여제가 오일러에게 디드로의 입을 막아버리도록 명령했다. 수학적 지식이 희박했던 이 프랑스 철학자에게 하루는 신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해보라고 누군가가 제의를 했다. 복수의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오일러는 그에게 다가가 "이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맞습니까?"라고 말했다. 디드로는 오일러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폭소에 당황한 디드로는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방대한 업적을 남긴 만큼 오일러의 인생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간 말년에는 수학문제를 풀기위해서 사흘 밤낮을 꼬박 몰두하다 다른 쪽 시력마저 잃게 된다. 당시 파리아카데미에서는 수여하는 권위있는 상을 수상하고자 저명한 수학자들도 몇 개월 붙잡는 어려운 문제를 단 사흘 만에 풀었는데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실명한 것 이었다. 양쪽 눈을 모두 잃었지만 오일러는 비서에게 자신의 생각들을 받아 적게 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업적을 남겼다. 1771년에는 집에 불이 나 많은 원고들이 불에 타버렸고 부인과 하인이 가까스로 오일러를 구한적도 있었다. 말년에 오일러는 뇌졸중으로 숨을 거뒀는데 수학자답게 짧게 단 한마디의 유언으로 "나는 죽는다!"남겼다고 한다. 오일러는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과학자로 여겨지고 있다. 많은 과학 사가들은 그를 아르키메데스나 뉴턴 또는 가우스와 대등하게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