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성찬
말의 성찬
  • 박철영
  • 승인 2007.07.1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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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신간 ‘남한 산성’을 읽었다.

 인조가 청의 대군에 쫓겨 초라한 행색으로 남한산성으로 파천해 47일 동안 칩거하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어 목숨을 구걸한 병자호란이라는 조선 최대 치욕적인 사건을 그린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화려한 말들속에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니 살아남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더렵혀지는 인간이 아름답다’라고, 또 실천 불가능한 정의나 실천가능한 치욕 그 어느 선택도 어렵고 아름답다고 역설한다.

 정말 그럴까?

 소설에서 김상헌은 피난하는 어가 행렬을 안내하고도 좁쌀 한 되 받지 못한 사공을 앞세우고 언강을 건너면서 “청병이 오면 곡식이라도 얻을까하여 또 이 강을 안내 할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사공의 목을 끓어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친다

 산성속의 말들과 관계없이 민초들의 삶은 늘 그러했고, 그러하며 그러 할 것이다라고 했다.

 언제나 정의나 이념은 말들속에 화려하고 삶은 아름답다고 한다.

 47일 동안 춥고 어두운 산성, 신하들의 부딪치고 뒤엉키며 솟구치는 창궐하는 말의 뒤편에는 왕은 피곤했고 백성들의 삶이나 목숨은 피폐했지만 차라리 진실하고 맑았다.

 작가의 이어지는 질문이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작가의 말조차 현란하다

 말과 글, 시간 그리고 길 그것들의 허무성 영속성·진실성 같은 것들이 책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의 중심일 것이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다 받아내지 못할진대 땅에 뻗은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다”라는 작가의 맺음말속에 인조의 치욕이 어떠한 말과 글로도 형언할 수 없다는 함의가 내포된다.

 요즘 세간의 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를 가나 화려한 말들이 눈부시다.

 사견이 사실로 둔갑하고 사실이 사견으로 바뀌는 말의 혼조다.

 음해, 모략, 아첨, 무고, 시기, 질투, 잘 포장된 말속에 숨겨진 더럽고 미운 것들의 정체다.

 때론 하는 사람도 사실로 믿고, 듣는 사람도 진실처럼 듣는다. 변명이 해명되지 못하고, 해명이 변명이 되어버리는 사회, 말을 아는 자들의 말의 오용과 남용이 빚는 원인일까, 헤아려 하지 못하고 헤아려 듣지 못하는 고착된 지식의 말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적으로 갖는 선택과 사람과의 관계, 그 매개체가 말이라 할 때 예나 지금이나 말은 참담할 때가 더 많았다.

 옛말에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베풀고 나누는 것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돈이 없어도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다. “무재 칠시”라 하여 재물이 없어도 일곱 가지는 배풀수 있다는 것인데 낮빛, 맘 가짐, 눈빛 등을 비롯, 마지막 언사시라하여 좋은 말씨를 꼽고 있다.

 돈 안들이고도 상대를 좋은 말로 배려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을 잘못하면 칼이 되고, 말을 잘 쓰면 천냥 빛도 갚는다. 사람의 품격을 가늠케 하는 품(品)자는 입구(口) 자가 세 개 모인 것이고, 말씀 언(言)자는 혀와 입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창세기 때 교만한 인간들이 쌓아올린 바벨탑을 부수어버리고 지구상에 하나 된 말을 혼동시킨 여호와께서 지금 더 참담하고 혼란한 말들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지금까지 한 이 말들도 재빨리 여러 모양새를 갖추고 발없이 벌써 천리밖을 벗어났을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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