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삶을 엿보다
그녀의 삶을 엿보다
  • 이소애
  • 승인 2007.07.31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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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에 이어 오늘도 폭염주의보를 내렸다. 태풍경보나 주의보는 귀에 익지만 폭염경보나 주의보는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아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기온의 상승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인지 나의 몸이 폭염을 이겨 내기가 힘들다. 아직은 폭염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가 않아서 식사 때가 되면 그리 좋아하지 않는 냉면이 아른거리곤 한다.

 지구상의 식물들도 생존을 위해 북상해야 한다고 한다. 식물의 북상 속도가 기온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꽃가루와 열매를 날라주는 동물과의 협력관계가 무너지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식물의 이동은 꽃가루와 열매의 매개동물 활약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온도에 맞도록 북상을 하는 일은 쉽지가 않을 상 싶다.

 우리 집도 부부가 서로 체온이 다르기 때문에 각 방을 쓰고 있다. 편안한 잠자리에 맞는 방을 찾아 제각각 흩어져서 자고 있다. 선풍기와 가습기가 있는 방과 두툼한 이불이 있는 방을 선택해서 자기 체온을 조절하며 여름밤을 보낸다.

 가끔은 모기란 놈이 침입하여 심술을 부리는 일 말고는 서로 아쉬울 것이 없다고 아침에 일어나면 말을 건넨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남편을 소개할 때에는 옆방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식물들이 자외선 방어에 많은 자원을 쓰게 되면 자연히 번식력이 낮아진다고 하지만 우리 부부야 식물처럼 씨앗을 생산할 일도 없으니 책장이나 넘기다가 잠들면 그만이다.

 올 봄에 나는 귀한 선물을 받았었다. 소양에 사시는 온후하고 자상하신 분으로부터 고구마처럼 생긴 홍초의 구근이었다. 곧바로 화분에 심었더니 푸른 싹이 돋기 시작하여 이젠 붉은 꽃까지 피었다. 신기하게도 홍초 뿌리를 화분에 심으면서부터 마치 컴퓨터에 CD를 넣고 화면을 보는 것처럼 그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분의 숨소리와 삶의 영상을 떠올리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모시 적삼을 입으신 그 분은 친정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먼발치서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매일매일 홍초에 다가가서 그분의 삶을 엿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초록 잎은 돌돌 두루마기처럼 말려서 세상에 나온다. 두루마기가 펴지면 타원형 잎이 된다. 펴진 잎에는 가느다란 줄이 그어져 있어 편지 쓸 때 사용했던 양면괘지 같아 보인다. 줄과 줄 사이에 빼곡하게 새겨진 그녀의 삶은 눈물과 한이 녹아들어 있었다.

 며칠 전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손수 농사지은 메밀가루를 주셨는데 그 하얀 메밀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지 않은가. 그분의 나이는 어림잡아 고희를 넘겼을 상 싶은데 오히려 나보다 힘차 보인다. 우리와 함께 시를 읽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잡혔던 주름이 자취를 감추는지도 모른다.

 땅을 향해서 허리를 굽힌 할미꽃을 보라. 할미꽃은 꽃이 시들고 은빛 수염이 피어나면 열매를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서 허리를 곧추 세우지 않는가. 그리고 곧추세운 꽃줄기가 쑥쑥 자라지 않는가. 자손을 퍼트리기 위한 처세술일 게다. 그렇듯 그분의 허리는 꼿꼿하다.

 지구에 쏟아지는 태양을 독자지 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걸까. 홍초의 꽃이 유난히 붉다. 몸속에 숨겨 둔 뼈아픈 삶이 녹아 세상에 외치는 절규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구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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