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고3가족’, 그 씁쓸함에 대하여
한국형 ‘고3가족’, 그 씁쓸함에 대하여
  • 김흥주
  • 승인 2007.08.10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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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 며칠 전 고3인 딸이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왔다. 사회학자인 난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대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때 아내가 옆에서 하는 말, “고3짜리 딸을 데리고 저렇게 태평하게 노닐고 있는 집은 우리뿐이야. 제발 도와주지 않으려면 빠져주세요.”

이야기 둘 : 수능 100일을 앞두고 대부분의 방송에서 수험생과 그 가족에게 훈계하는 시험 ‘지침’들을 종합해보면, “모든 것을 수험생에게 맞추고, 가족 모두는 수험생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야 합니다”로 요약할 수 있었다. 우리 가정도 당연히 텔레비전도 끄고, 컴퓨터 사용도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당장 코앞에 닥친 다음 학기 강의준비와 논문작성을 위한 야간작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의 가족을 40년 넘게 연구한 최재석 교수(고려대 명예교수)는 서구의 가족이론이 제시하는 확대가족(extended family)과는 전혀 다른 우리만의 ‘직계가족’을 개념화하여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서구의 확대가족이 한 가족 안에 2쌍 이상의 부부가 있거나, 3대 이상의 친족이 있는 가족이라면 우리의 직계가족은 3대 이상이 모이기는 하지만 차남 이하는 필연적으로 분가하기 때문에 장남 중심의 부계로 가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최교수는 이러한 직계가족을 서구의 확대가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Jikke-family'로 영역하여 학계에 보고하였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이러한 직계가족과 유사하게 우리 사회 특성을 현실적으로 반영하여, 한국만의 가족구성 원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3가족’이다. 그런데 직계가족의 발견이 위대한 학문적 성과로서 부러운 마음이 가득한 반면에 한국형 고3가족에 대해 연구를 하면 할수록 마음 한편으로 씁쓸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우리 사회의 고3가족은 앞의 이야기들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듯이, 서구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보통 가족과도 전혀 다른 가족구조와 가족관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가족의 역할구조가 완벽하게 전복(顚覆)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고3 수험생이 가족의 중심에 놓여지고, 다른 가족원들은 모두 이에 종속되는 구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모-자-녀’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지위에 맞는 역할과 임무도 수행할 수 없다. 오히려 자녀에게는 수험생의 지위만 주어지고, 부와 모는 이를 지원하는 의무만이 남는다.

이러한 역할구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가족원은 ‘고3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이로부터 사정없이 질타 받는다. 이야기 하나의 아버지가 그러한 것처럼. 나아가 고3 수험생의 시험공부 외에 모든 가족활동은 제한되어야 한다. 한 평생의 자녀 서열이 결정되는 대학 입시에서 ‘고3짜리’ 자녀의 합격을 위해서는 모든 가족이 똘똘 뭉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서 고3가족 자녀의 대학합격은 비단 개인의 성취일 뿐만이 아니라 가족전체의 성취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오죽하면 자녀의 대학서열이 부모서열로 환치되는 경우까지 생기겠는가? 그래서 이야기 둘의 아버지는 자녀 공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일을 일정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강요하는 가족 역할 때문에 아버지 일이 갈등적으로 조율되는 과정이다.

가족의 권력구조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가족관계의 중심이 고3 수험생인 자녀를 중심으로 재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녀에 대한 가정교육은 실종될 수밖에 없으며, 부부관계 또한 자녀교육을 위한 수단으로서 유지될 뿐이다. 부자관계는 학비벌이와 학생의 관계로, 모녀관계는 밥 해주는 사람과 학생의 관계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고3가족은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가 지적한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적 영역으로서 보호되어야 할 일상의 가족이 대학 서열을 중시하는 사회 환경에 의해 철저하게 재편되고 전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민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가족 구성원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고3짜리 자녀는 자녀대로, 이를 지원해야 하는 부모는 부모대로 힘겨운 상황이다.

이러한 고3가족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하는 일은 ‘경쟁에서 이기려면 모든 가족생활을 포기하라’는 것뿐이다. 가족을 위해 입시위주 교육체계와 서열중심의 사회체계를 바꾸어가려는 노력은 언제나 뒷전이다. 그래서 한국형 ‘고3가족’의 발견은 최 교수의 직계가족 발견과는 달리 씁쓸하다. 한국적 상황을 너무나 잘 보여주기에 더욱 그렇다.

<원광대 복지보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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