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관찰사 이완용(李完用)
전라북도 관찰사 이완용(李完用)
  • 최명환
  • 승인 2007.08.1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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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는 광복절(15일)과 국치일(29일)이 있다. 그래서 나라의 흥망을 더 생각해 보게 되는 때다.

우리는 자기 이익을 위해 국가의 주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자를 매국노라 부른다. 매국노의 대명사는 이완용이다. 그 이완용이 얄궂게도 우리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신(臣) 등이 정부의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극력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본분에 비춰 볼 때 어찌 감히 스스로 죄에서 벗어 날 길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규탄하는 사람들이 해당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당일 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명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요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 된 것입니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후 이완용 등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상소문대로 그 때의 사정도 모르면서 이완용을 매국노라 부르는가?

이완용(李完用)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서 1858년 6월 7일 태어나 10살때 판중추부사 이호준의 양자가 됐다.

이호준은 조성하의 장인이며 조성하는 제24대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의 친정조카이다.

188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해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고 1907년 6월 14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학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매국노가 됐다.

내각총리대신으로 정미7조약, 한일합방 등을 조인한 그는 조선총독부중추원고문과 부의장, 제1회조선미술전람회심사 위원, 조선사편수회 고문 등도 지냈다.

한일합방 공신으로 1910년 10월 7일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듬해인 1911년 1월 13일에는 15만원의 은사금도 받았다.

1919년 당시 쌀 한가마 값은 41원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5억5천만원이 되는 큰 돈이다. 1920년 12월 28일 후작으로 오른 그는 1926년 2월 12일 사망하자 한달뒤인 3월 15일 손자 이병길(李丙吉)이 후작의 작위를 세습했다.

이래도 매국노라 부른 것이 우리의 잘못인가.

이완용은 1898년 3월 11일부터 1900년 7월 22일까지 전라북도 관찰사를 지냈다. ‘전라북도 관찰사 이완용씨는 근일 부안 등 5개군에 유람하는데 따르는 기생이 4명이며 주사 6명에 나졸을 합쳐 행차 인원이 1백여명에 이른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관찰사로 있으면서 익산 낭산면 낭산리에 있는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을 자기의 묘 터로 잡아 놨다. 이완용은 사망당시 장례행렬이 순사의 호위아래 10여리에 이어질 정도였다 한다.

한 때 봉분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 순사를 묘지에 배치하기도 해 ‘이완용은 죽어서도 일본 순사의 보호를 받는다‘고 했다.

지금은 그 좋은 자리에 있던 묘도 그 후손이 매국노의 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없애고 이민을 갔단다. 살아서의 부귀영화만 생각 했지 죽어서 이런 치욕을 당할 줄 생각이나 했을까.

익산 낭산면 낭산리에는 이완용과 손자인 이병길의 땅이 14필지에 5천7백㎡가 있다. 이는 관찰사로 있을 때 생긴 땅인 듯하나 이도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으로 국가에 귀속됐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본인은 평생 잘 먹고 잘 살아 선택을 잘 했다고 했겠지만 그 자손을 보면 순간의 선택은 잘못 한 것 같다. 그리고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잠깐이라 했다.

하물며 68년이야 순간일 텐데 순간을 아무리 잘 살았다 해도 매국노 소리를 듣지 않음만 할까. 세월이 얼마나 더 가야, 아니 수천 년이 흐른들 매국노라는 이름이 지워질까. 후세를 사는 우리로써는 깊이 새겨봐야 할 일이다.

<익산보훈지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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