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꽃 무궁화
나라꽃 무궁화
  • 안영환
  • 승인 2007.08.1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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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복 62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나라 찾기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하셨다.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세계에 우뚝 선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해마다 광복절이면 독립운동가 생각나고 나라꽃 무궁화가 어김없이 함께한다. 1900년경 민족의 지도자 남궁억 등 선각자들은 열강의 침탈을 이겨내는 민족자존의 상징으로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결의한 것을 시발로 하여 상해 임시정부가 세계만방에 펼친 독립선언서의 문양을 자랑스러운 태극기와 무궁화로 장식하였다.

나라꽃 무궁화로 우리 민족의 광복에 대한 의지를 승화 시켰고 민족혼 고취에 큰 공헌을 하신 구한말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며 교육자이셨던 한서 남궁억 선생님, 그는 무궁화를 통한 민주 광복운동을 펼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돼 키우던 무궁화나무를 모두 소각당하고 온갖 고문을 당하다 감옥에서 얻은 병환으로 돌아가셨던 ‘무궁화사건’, 이 사건으로 국민들로부터 민족의 꽃, 나라꽃으로 보다 확고히 자리매김 되어 오늘날까지 나라꽃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특히 1996년에는 당시 총무처에서는 “국가 상징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사계의 전문가 20여명을 자문위원으로 하여 국가의 상징인 국기(태극기), 국화(무궁화), 국가(애국가), 국장(나라문장 국새)을 확실하게 고증하고 그 위치와 품격마저 한층 더 확고히 정립 공포하였다.

우리나라 국가상징물인 무궁화는 우리 민족 문화 정체성의 최상위에 자리하고 있는 국가 상징물이며, 또 우리 민족 문화정체성의 핵심이다. 5천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해온 민족의 꽃이며 무궁화 정신이 담겨진 민족의 얼이다.

단군조선이 세워지기 이전의 시대인 신시시대 때에는 무궁화를 환화(桓花)라고 불렀으며, 단군 조선시대에는 환화, 천지화(天指花), 훈화(薰花), 근수(槿樹)로 불렸으며, 삼국시대에는 무궁화가 많은 나라라 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 하였으며, 고려 고종때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최초로 무궁화(無窮花)라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를 빼앗기면서 무궁화의 수난도 시작되었다. 독립 운동가들이 무궁화를 우리의 표상으로 내

세우자 모두 뽑아버리거나, 쳐다보면 눈에 핏발이서 죽는다. 몸에 닿으며 부스럼이 생긴다. 진딧물이 심하고 지저분한 꽃이라는 악의적인, 부정적인 이미지로 덮어씌우기를 하는 등 우리 국민과 멀어지게 하려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 나라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무궁화에 온갖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숨어서 무궁화를 심고 또 심었습니다.

지난 8월13일 산림청과 국립산림과학원이 주최가 되어 제17회 나라꽃 무궁화 축제가 부산 동백섬에서 열렸다. 18일까지 계속된 축제에는 70여 품종, 2천여 작품이 출품되었고 전시, 체험행사 등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었다. 명실 공히 벚꽃 축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꽃 무궁화 축제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80년대 교육부에서는 무궁화 교육을 시키면서 무궁화동산을 조성하였으나 거의 없어지면서 무궁화 정신부족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학교진입로 조성, 교내 동산 조성, 교육 프로그램 운영, 한해에 한번 정도의 행사를 가져 장래의 주인공에게 무궁화 정신을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전북도 산림환경연구소 임업연구사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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