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잃어버린 농심
가을을 잃어버린 농심
  • 이보원
  • 승인 2007.08.3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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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결이 넘실대야 할 부안 계화들녘에 풍요로움과 수확의 기쁨 대신 농민들의 분노와 한숨이 가득하다.

누렇게 영글어 수줍은 새색시처럼 고개를 숙여야할 벼이삭은 검불처럼 말라 뻗뻗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원망하는듯하다.

굉음을 토해내면서 트랙터가 지나가자 지난여름의 땀방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허탈과 분노만이 솟구쳤다.

여든 여덟번 손이 가야 쌀한톨이 나온다는데….

유난히 기승을 부린 폭염이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지치고 힘들게 했던 지난여름 자식처럼 온갖 정성을 들여 가꿔온 벼 수확을 포기한 채 갈아엎어야 하는 농심은 천갈래 만갈래다.

쇠에서 나온 녹이 쇠를 먹어들어가듯 농사짓는데 사용돼야 할 트랙터가 이번엔 거꾸로 벼를 갈아엎는데 동원됐다.

“억장이 무너집니다.”

농민들의 절규는 피를 토한다.

기억하기도 싫은 30년전 노풍벼사건.

그때도 줄무늬잎마름병이 노풍벼를 휩쓸어 농민들은 검불만 움켜쥔채 무심한 하늘만 원망했다.

그렇게 사라졌던 줄무늬잎마름병이 30년만에 망령처럼 부활해 한해 농사를 망치리라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벼 에이즈라 불리는 줄무늬 잎마름병에 걸려 검붉게 타버린 벼들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가슴은 까맣다 못해 아예 숯덩이가 됐다.

병충해로 타버린 벼들은 제초제를 맞은 것처럼 바짝 말라 있고 벼이삭들은 한결같이 쭉정이뿐이다.

이렇게 폭격을 맞은 것처럼 한해 농사를 망친 논은 계화일대농경지 3천124ha의 절반인 1천508ha.

생계가 막막한 농민들은 배수의 진을 쳤다.

병해충이 휩쓸고 지나간 계화일대를 자연재해지역으로 지정하고 정부가 나서서 피해보상을 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납득할 만한 대책이 수립되지 않을 경우 가을 걷이가 끝나는 대로 대규모 농민투쟁에 나설 것임을 선포했다.

하지만 농정당국은 병해충은 자연재해가 아니기 때문에 농업재해로 인정할 근거가 없다며 원칙론을 고수한다.

한미FTA비준등을 앞두고 정부와 농민 간에 첨예한 갈등이 예고되고 있는 마당에 농민들의 대정부 투쟁을 증폭시킬 또 하나의 뇌관이 보태진 셈이다.

사실 이번 부안일대의 벼 줄무늬잎마름병 사태는 농정당국의 무사안일한 행정에도 책임이 적지 않다.

지난겨울 이상 고온현상으로 계화일대 논두렁에는 그 어느 때보다 벼줄무늬잎마름병 매개충인 애멸구가 득실거렸다.

애멸구가 매개체인 벼줄무늬잎마름병은 바이러스성으로 일단 감염되면 치유가 안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농정당국은 과연 그동안 무얼 했는지 묻고 싶다.

병해충 발생 가능성을 농민들에게 사전 경고하고 이에 따른 대책이나 사전 예방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사태가 커질 대로 커진 지난 7월 말에야 헬기 등을 동원해 부랴부랴 공동 방제에 나섰지만 사후약방문이나 다름없다.

농민들의 피맺힌 절규에 이제 정부와 농정당국이 답변을 해야 한다. 가을을 잃어버린 채 병해충 피해로 한해농사를 망친 농민들의 가슴에 뚫린 생체기에 이번엔 장대비가 소금처럼 퍼붓고 있다.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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