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눈물
남자의 눈물
  • 김흥주
  • 승인 2007.09.1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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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 한권과 영화 한편이 가을 문턱에서 남자의 눈물을 생각나게 한다.

먼저 책이야기. 조선시대 후반의 특수 기행문들을 전문연구자들이 풀어낸『역사, 길을 품다』(송기숙 외)를 읽노라면 의외로 눈물 많은 조선의 남자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다. 장례길, 유배길, 상소길, 과거길, 암행어사 길에서 끊임없이 남자들이 눈물을 흘린다. 서러워서도 있지만 소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로 알고 있었던 조선의 남자도 눈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음은 ‘브라보 마이라이프’란 영화 이야기. 가장이란 현실, 그 무게 때문에 ‘내 삶(마리라이프)’에 한번도 ‘브라보’ 해본 적 없는 그들. 영화는 현실이란 이름으로 거세된 가장들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도 눈물을 흘리지만 난 소리 내어 울었다. 남자의 눈물은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어릴 때부터 남자가 훈육 형식으로 강요받는 것은 “남자는 울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세 번의 기회는 있다. 태어났을 때,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임종을 맞이할 때. 그중에서 사회적 용인아래 개인의지로 흘릴 수 있는 눈물은 부모상 때뿐이다.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만큼 사회적 제제가 많다.

이유는 한 가지, 우리 사회의 왜곡된 ‘남자다움’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남자가 된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전투와도 같다. 남자는 공격적이고, 이성적이고, 독립적이며, 합리적이고, 적극적이고, 모험적이어야만 ‘남자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나약하거나 소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평생을 노력한다. 이러한 남자여야 경쟁과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남자, 겁이 많아 남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남자, 나약한 남자들은 허다하다. 이들은 남자다움이라는 집단적 이상과 개인의 실제적인 삶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를 느끼며 살아간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들은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며,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이른바 ‘강한 남성 콤플렉스’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마초(macho) 이미지와 마치스모(machismo) 현상이다.

마초란 신체적, 성적, 심리적, 또는 지적으로 남성은 우월하다고 여기며 행동하는 남성으로 소위 남존여비 신봉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지나친 우월 의식은 내적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시도이며, 외형적인 기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것은 겁이 나고 두렵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를 점점 더 남자다움의 굴레 속으로 가두면서 여성에게는 강한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치스모 현상은 자신을 잃고 불안해진 남성이 여성에게 성폭력을 일삼거나 구타하는 등 무모한 짓을 함으로써 자임을 과시하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말한다. 이는 과도한 책임감, 과도한 권위주의적 사고방식, 과도한 남성 과시적 행동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보여주는 행태이며, 이는 가정과 사회의 건강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자다움이라는 조작된 환상은 스스로에게도 심각한 문제를 안기고 있다. 진정 강한 남성이라면 모르지만, 대다수 나약함을 숨기고 있는 강함을 요구하는 현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고개 숙인 남성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일, 사회, 가족의 무게를 한 몸에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 남자들. 그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 가족은,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남자다움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껍질뿐인 권위의식을 움켜쥔 외로운 남자보다는 울 수 있고,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엄한 가부장적 사회인 조선 후기의 남자들도 힘들면 울지 않았던가?

이제 남자들이 고독한 영웅으로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가장이자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가족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삶도 소중하지만, 개개인의 욕구충족을 위해 합심하여 도와주는 가족의 모습도 필요하다.

그래서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조부장이 외쳤던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데 한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 까? 한번쯤은... 그러면 사치일까?”라고 자조하는 모습이 전설로만 남아있길 기대해본다.

<원광대 복지보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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