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과 ‘면피’
‘완장’과 ‘면피’
  • 김진
  • 승인 2007.10.0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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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을 치다보면 피(껍질) 6장을 확보하지 못하면 피박을 쓰게 되고 결국 잃은 판돈의 2배를 물어야 한다. 그래서 고스톱이 벌어진 판을 보면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피박은 벗고 쳐야지!’ 라고들 한다. 하기야 같은 조건으로 모여 앉아 화투치고 노는 바에야 지더라도 면피는 해서 2배로 돈을 내는 억울함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한데 화투판도 아닌 행정에서 ‘면피’용 관변위원회제도가 예산만 낭비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근대사에서 위원회의 근간을 찾자면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의례적으로 통과 시키는 도구 역할을 했고, 친일파를 관변으로 중용하는 계기로 삼던 ‘각종 협의회’가 그 시초가 되는 것이다. 또 해방이후에는 권력의 재구성을 앞두고 건국준비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 당시의 영상자료를 통해 활동장면을 보면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어깨에 차고 있던 완장이다. 마치 권력기관의 신분증이나 된 듯, 으스대던 완장 말이다.

*늘어난 완장

지금 현재 노무현 정부를 보면 정권 출범 직전에 비해 장관급 자리는 33개에서 40개로, 차관급은 73개에서 96개로 늘어났다. 동북아시대위원장,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진실화해위원장,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장,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 등이 현 정부에서 새로 생긴 장관급으로 매년 억(億)대의 연봉과 그 이상의 판공비가 지급되고 있다. 이는 필요이상의 직급을 부여함으로써 혈세를 낭비하고 정부조직을 방만하게 키우는 직급인플레로 ‘완장’ 채워주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실제로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에 173억 원이었던 18개 대통령 소속위원회의 예산이 29개 위원회로 늘면서 1.976억 원으로 10배나 늘었으며, 국무총리 소속위원회까지 합친 예산은 연간 4.333억 원이라고 하니 누가 뭐래도 할 말은 없겠다.

또한 반부패국민연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부중앙부처, 외청, 지방자치단체, 정부투자기관 등 209개 기관에 설치된 6,000여개의 각종 위원회 중 25%가 1년에 한 번도 회의를 개최한 적이 없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니 그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할 일이다.

* 면피용 위원회

이러한 각종 위원회의 실태는 전북지역 지자체의 실정도 과히 다르지 않다. 각종사업이나 정책마다 위원회를 만들어 행정의 들러리로 내세우거나, 시행령의 규정에 맞추고 감사의 지적을 피하는 업무의 면책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실로 참여정부라는 이름과 지방자치의 취지를 무색케 하고 있는 것이다.

포털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자고나면 생겨나는 게 민관협의체이다. 하지만 주민에 의한 자치와 민·관 협의라는 외형만 갖추었을 뿐 실제적인 역할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전반적인 현실이다. 실례로 위원회와의 협의라는 것이 사전 협의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고, 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안마저도 행정의 편의나 단체장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여기저기 급조되는 위원회의 형상이 감투랍시고 완장하나 채워주던, 반세기전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꼭 의회만이 주민의 대의기관은 아닐 것이다. 지역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각종민관협의체 역시 부분적인 주민의 대의기관이 될 수 있다. 지금 지역의 여러 방면에서 행정에 힘을 보태고 있는 위원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지위가 주민들의 생각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회의 한 번 열릴 때마다 여비 받고, 식사대접 받는 재미로 일하다가는 ‘부실위원회 정리위원회’의 소환대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경희대학교 무역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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