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현충시설 - 이재명의사 동상
우리고장 현충시설 - 이재명의사 동상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1.04.26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명 의사는 평양에서 태어나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의 이민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귀국하였으며 친일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먼저 없애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金貞益)이, 송병준은 이동수(李東秀)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계획하였다.

1909년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뒤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오전 11시 30분경 이완용이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것을 허리와 어깨 등을 칼로 찔러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경찰에 의해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의거 직후 의사는 “나는 모든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이 거사를 행하였다. …오늘 우리의 공적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라고 말하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경시청에서 일본인 순사가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선생은 “공범이 있다면 2천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기도 하였다.

사형선고를 받은 뒤, 이재명 의사는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국가를 위한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라고 최후의 진술을 하였다.

이재명 의사의 용기있는 의거는 나라와 민족을 판 이완용에 대한 민족적 심판이었고, 일제의 탄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족혼을 보여주며 민족의 각성을 촉구한 사건이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이재명의사 추모 사업회에서는 진안 이 씨 문중 재실 앞에 이 상을 세웠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03년 이재명의사 동상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진안제일고와 결연을 맺어 정기적 참배 및 정화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위치=전북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356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