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기념일 알리기 - 4·19혁명 기념일
보훈기념일 알리기 - 4·19혁명 기념일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1.04.19 15: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19혁명 기념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머리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으로, 이 혁명의 정신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 정신의 밑바탕이 되었다.

테이프를 앞으로 더 감아 혁명의 발화점을 짚어보자.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러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집권을 이어가기 위해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대규모 부정선거(3·15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이 공산당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4월 11일 1차 마산시위(3월 15일)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체로 발견됐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의 3천여 명의 학생들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았고, 일부 학생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다음날인 4월 19일,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였다.

4월 25일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여기에 4월 26일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군중들은 정권의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였고,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처럼 지금의 자유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당시 부정에 눈감지 않고 용맹히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유공자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말고, 끊임없는 관심과 감시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평화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전북동부보훈지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