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44) 정춘근 시인의 ‘지뢰꽃’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44) 정춘근 시인의 ‘지뢰꽃’
  • 강민숙 시인
  • 승인 2021.03.0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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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꽃’

 

- 정춘근 시인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 없는 꽃

꺾으면 발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저 꽃의 씨앗들은

어떤 지뢰 위에서

뿌리내리고

가시철망에 찢긴 가슴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흘깃 스쳐 가는

병사들 몸에서도

꽃 냄새가 난다

 

<해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우리나라가 세계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입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만 가면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녹슨 철조망이 있는 DMZ를 마주하고, 꽃다운 나이의 병사도 대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괜스레 뜨거운 것이 울꺽울꺽 치밀어 오릅니다. 꽃다운 청춘들이 군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분단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대물림을 해야 하는 무능한 기성세대라는 자책감마저 듭니다. 또 문인으로서 민족이 고통 받고 있는 분단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녹슨 철조망의 가시처럼 마음을 찌릅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문학의 신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분단의 아픔을 시로 형상화해내는 시인이 있어 위안이 됩니다. 이 시인은 철원에서 태어나고, 철원에서 살고 있으며, 철원에서 아마 생을 마감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표작도 「지뢰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다 그 시인이 삶의 뿌리를 내린 곳이 무서운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터지면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어져버리는 지뢰 뇌관과 함께 아슬아슬 살아가야 하는 이름 없는 꽃. 그런데 한 발 물러나 생각해보면 지뢰꽃은 최첨단 무기로 아슬아슬 겨우 살아가고 있는 우리 7천만 민족 모두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이름 없는 꽃/꺾으면 발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제 이념에 맞는 꽃을 피우고 지는 이름 없는 꽃이라고 했네요. 그렇지만 시인의 가슴에는 무서운 폭발물 위에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겠다는 옹골찬 의지가 엿보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영토에 다시는 화약 냄새가 풍기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도 보입니다.

 

언젠가는 저 무서운 ‘지뢰꽃’을 걷어내고 평화의 꽃들이 만발하는 봄날을 기다려 봅니다.

 

강민숙 시인 /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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