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5> 즐거움, 차를 겨루다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5> 즐거움, 차를 겨루다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1.02.21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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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과일나무 심기를 좋아한다. 여기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 내가 심은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하나씩 맺을 때 바라만 봐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먹어보면 더욱 맛이 좋다.”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307~365)는 글씨에 열중할 때는 삼매경에 들었으며 온통 글씨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도 스스로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이렇게 찾은듯하다. 즐거움은 처해 진 상황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지만, 옛사람들은 즐거움이란 스스로 얻을 줄 알아야 복이 된다 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의 뿌리에 달려있음이다. 왕희지처럼 할 수 없다면 아침에 일어나 몸을 바르게 하고 맑은 차 한잔을 마신다면 벌써 마음이 맑아지니 복이 갖춰지고 하루의 일이 즐거울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초당에 머물면서 옛일을 추억하며 신선이 되는 즐거움을 읊은 시가 있다. 이연종(李衍宗)의 「박치암이 차를 보냈기에 감사를 표하며(謝朴恥菴惠茶)」이다.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치암은 박충좌(朴忠佐 1287~1349)의 호이다. 치암이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용봉차를 이연종에게 보내자 이연종이 감사를 표한 글이다. 진귀한 차를 선물받고 젊은 시절 사찰에서 승려들과 차를 겨루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의 맛을 즐기고 있다.

 

  용암 봉산 기슭 대숲에서, 승려를 따라 매부리처럼 여린 찻잎을 땄었지.

  소년 시절 영남사(寺) 찾아가, 여러 번 승려들과 명전(茗戰)에 참여했지.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으뜸인데, 더구나 용천봉정 샘물까지 있음에랴.

  사미승들의 삼매에 빠진 날랜 솜씨로, 찻잔 속에 흰거품을 쉬지 않고 만드네.

  돌아와 벼슬살이의 풍진세상에 매달려, 세상살이 이리저리 두루 맛보았네.

  이제 늙고 병들어 쓸쓸한 방에 누웠으니, 번잡한 세상사 내 상관할 바 아니거늘.

  양락(羊酪)과 순갱(蓴羹)도 생각이 없고, 대궐도 풍악도 부럽지 않네.

  한낮의 대나무 창으로 드는 볕에 먼지가 반짝이고,

  낮잠에서 깨어 한 사발의 차 요긴하구나.

  영남사에서 차 달이던 일 몇 차례 추억했던가,

  산중의 벗들은 아무 소식조차 없구나. (후략)

 

  영남사는 현재 경상남도 밀양시 영남루 자리에 있는 절이다. 그의 시로 보아 고려때 사찰에서 ‘명전(茗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차를 겨루는 것으로 주로 품다 즉 차를 품평하는 것이다. 한식 전에 찻잎을 따서 만든 차이니 아주 여린 잎의 최상품의 차를 의미한다. 승려들의 날랜 솜씨로 찻사발 속에 흰 거품을 만들어 차를 맛보았음을 회상하고 있다. 바쁜 벼슬살이에 잊은 차의 맛을 추억하고 있다. 명전은 송대때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투차(鬪茶)와 성격이 같다. 이때 사용되는 차는 단차로 점다(點茶), 격불(擊拂)을 통해 차의 거품이 얼마나 잘 일어났는가에 달려있다. 최고의 차는 알맞은 온도로 끓인 물과 격불 솜씨가 우열을 가린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기 찻잔이다. 찻그릇의 색상과 격불된 차의 조화는 차가 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연종은 이제 늙어 번잡한 세상살이 상관할 바 아니며 양락과 순채국도 필요없고 대궐도 풍악도 부럽지 않으며 햇빛이 잘드는 초당에 누워 한 사발의 차가 제일이다고 한다. 어찌 재상가에서 이미 벼슬에서 물러난 소원한 사람을 기억하여 하사받은 차를 나눠주니, 봉합을 열었을 때 그 향기 지극하여 조심스러워 차 달이기 걱정되지만 찻물 끓는 솔바람 소리에 마음과 귀가 맑아지며 가득한 차 향기와 맛이 목으로 넘어가니 신선이 된 듯하다는 시이다.

  차의 맛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옛일을 생각나게 하고 고마움을 느끼게 하며 맑은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즐거움을 찾기에 족할 만한 것인 듯하다.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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