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3> 사인증다마(謝人贈茶磨)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3> 사인증다마(謝人贈茶磨)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1.01.2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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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맷돌, 강화도 선원사지에서 출토(고려)

 우리네 인간사에서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요즘은 선물의 의미가 퇴색되고 그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차와 다구를 선물로 보내며 고마움을 전하는 시가 있어 우리는 그 당시의 차 문화를 볼 수 있다. 보내는 이의 아름다운 마음과 고마움을 표하는 시 또한 아름답다.
 

  돌 쪼아 바퀴하나 이뤘으니
  맷돌을 돌리는 데 한 팔만 쓰는구나.
  자네도 차를 마시면서
  왜 나에게 보내주었나.
  내가 유독 잠을 즐기는 것을 알아
  그래서 나에게 부쳐 온 게지.
  갈수록 푸른 향기 나오니
  그대 마음 더욱 고맙네그려.
 

  이 시는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차 맷돌을 준 사람에게 감사하다(謝人贈茶磨)”라는 글이다. 선물로 받은 맷돌로 직접 차를 갈며 스며 나오는 차 향기에 고마움을 읊은 듯하다. 차 맷돌은 당시 차를 즐기는 사람에게 필요했던 다구이다.

  고려 때는 찻잎을 다관에 우려 마시는 잎차가 아닌 단차(團茶)가 유행했었다. 단차는 기본적으로 찻잎을 찌고 찧어서, 틀에 박아 말린 것으로 둥근 모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차는 차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다완(茶碗)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다선으로 차가 물에 잘 풀리도록 저어서 마셨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단차를 갈아야 할 차 맷돌과 도구가 필요했다. 지금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처럼 고려 때에는 단차를 마시기 위해 차 맷돌이 필요했다.

  이는 송나라 때 유행했던 음다 방법으로, 지금의 가루차는 송대의 단차 제조와 마시는 방법에서 비롯됐다. 단차는 종류가 많았으며 아주 정교하게 만든 차와 조금 거친 차 등 제다 방법에 따라 차의 품질도 다양했다. 문인들은 차를 선물로 주고 받으며 시를 짓고 차를 품평하였다. 특히 이규보는 차와 관련된 많은 시를 남긴다. 다음은 “일암거사 정분이 차를 보내준 데 감사(謝逸庵居士 鄭君奮寄茶)”하여 지은 시이다.
 

  그리운 소식 몇 천리를 날아왔는고
  하얀 종이 바른 함에 붉은 실로 얽었네.
  내 늙어 잠 많은 줄 알고서
  햇차를 달여 먹으라 구해 주었구려. 

  벼슬이 높아도 검소하여 나을 것 없는데
  여느 것도 없거든 하물며 선다(仙茶)이랴.
  해마다 홀로 어진이의 덕을 입으니
  이제야 이 세상 재상 집 구실을 하네.
 

 정분은 고려 고종(1192~1259) 때의 무신으로 참지정사를 역임하였다. 당시 권력자였던 최우와는 처남 매제 간이었다. 멀리서 보낸 ‘하얀 종이로 포장하여 붉은 실로 묶은 차’로 보아 햇차임을 짐작한듯하다. 검소한 그에게 햇차는 ‘선다’를 안겨주었고 ‘이제야 이 세상 재상 집 구실을 한다’라고 여겼다. 한 통의 차는 그에게 재상가에서나 맛볼 수 있는 진귀한 것이었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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