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전북문학기행] (21) 이제는 거대한 아파트 사이로, 보리차 냄새가 가득한 내 아파트 - 서윤후 시인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2020 전북문학기행] (21) 이제는 거대한 아파트 사이로, 보리차 냄새가 가득한 내 아파트 - 서윤후 시인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 이휘빈 기자
  • 승인 2021.01.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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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성동 북초등학교 일대의 아파트 단지 내 상가들은 80년대와 90년대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신축된 아파트 단지 사이로 작은 아파트들은 마치 새 드레스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레트로 스타일드레스 같은, 친근함과 이질감이 공존한다. 학원들과 약국, 내과와 안경점 등이 섞인 상가 사이로 거니는 주민들은 총총거리며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로 돌아간다. 북초등학교 및 호성동 일대의 골목을 느린 발걸음으로 거닐다보면, 90년대의 풍경은 이제 많이 지워져 있어도 분식집, 문구점, 야채가게 등에서 그 흔적을 마주 할 수 있다. 아마 학교가 끝난 초등학생들은 용돈을 만지작거리면서 튀김 냄새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서윤후 시인은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20살까지 살았다. 그는 어렸을 때 살았던 호성동 일대에 대해 소중한 추억을 품고 있다. 동물원으로 가던 수학여행, 하늘아래 덩그러니 버스를 기다리는 버스정류장, 그 주변의 오래된 가게의 모습은 그의 시에서 다시 피어나며 일상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서 시인은 “전주에 대해 본격적으로 쓴 적은 없지만, 제가 표현하는 일상과 과거의 풍경은 저마다 전주를 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에 실린 ‘외상(外傷)’이라는 시에는 이 정서가 잘 담겨 있다.

 ‘보리차 끓이는 동안엔 할 일이 많아진다. 일단 엄마부터 찾고, 집에 누워있는 사람 없으면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 빈집에 주전자만 끓고 있다. …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을 땐 손잡이가 잡고 싶어진다. 조금씩 열려 있는 문들마저 닫고 주전자 뚜껑만 반쯤 열어놓는다. 넘쳐흐르지 않게 파수꾼처럼 식탁에 앉아 숙제한다’

 시는 방 안에서 홀로 보리차를 끓이는 풍경으로, 그리고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90년대 많은 아이들은 학습지와 숙제와 보리차로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빈 방의 숙제는 괴로움이자 장난감이었다. 시인은 담백한 문장들로 당시의 기다림을 노을빛으로 수놓고 있다.

 시인에게 전주는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어서 시인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전주를 쓰지 않았지만, 그 풍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소중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시인은 “첫 시집은 제 마음의 근원 같은 것을 담아내다 보니, 자주 제가 자라온 전주를 생각하고 떠올렸다. 지금의 저를 결정했던 오래전 순간이 전주라는 풍경 속에 있었으니까”라며,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여전히 기쁘고 즐겁다”라고 말했다.

 방학으로 휑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 세 명이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자동차 소리가 멀어진 사이로 마스크를 낀 아이들의 웃음은 발랄했다. 이 아이들이 청년이 된 후에 서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어떤 기분일까, 라고 중얼거렸다. 만두집의 뿌연 김이 하늘의 구름까지 닿는 오후였다.

 이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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