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 이은봉 시인
우리 집 거실 귀퉁이에는
무말랭이가 마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말랭이가 마르던 곳이다
땅콩알이 마르던 곳이다
은행알이 마르던 곳이다 구린내를 풍기며
인삼주도 더덕주도 호박덩이도 함께 마르고 있는
우리 집 거실 귀퉁이
고향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농촌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대도시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와 아내는 여태껏 농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오가며 살고 있다
좁아터진 거실 이곳저곳을 오가며
오늘도 아내와 나는 습관처럼
자연에서 준비해온 먹거리들을 다듬고 있다
이것들 다 나날의 목구멍이 시킨 것이지만,
나날의 생활이 시킨 것이지만......
목구멍보다, 생활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으랴.
<해설>
시인의 시를 읽다보니 문득 어릴 적 시골집이 그리워지네요.
이 시 안에는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유년 시절 마루에서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누구네 집이나 마루 한 귀퉁이에 늙은 호박 몇 덩이가 포개져 있는 시골집. 밤이면 마당에 호박덩이 같은 둥근달이 빨래줄 바지랑대에 덩실 걸려 있고, 아버지는 자식들 방에서 문소리가 날 때 마다 화장실 가는 길 무섭지 않게 기침소리를 내 주던 시골집이 그리워집니다. 아직도 큰언니는 대도시 아파트에 살면서도 고향집을 오가며 시래기를 가져다 말리고, 가지를 말리면서 가난에 젖어 살던 그 시절을 말리며 살아갑니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거실 귀퉁이에 무말랭이가 마르고, 감말랭이가 마르고, 은행알이 마르던 자리”에서 시인은 오늘도 습관처럼 먹거리들을 다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 다 나날의 목구멍이 시킨 것”이라고 하네요. 갑자기 목구멍보다 더 진실한 것이 어디 또 있을까 싶네요.
요즘 젊은 시인들이 쓰는 시는 생활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사랑하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시를 자꾸 어렵게만 써서 시를 읽으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러나 이 시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서정의 힘을 잘 보여 주고 있어서 여러 번 읽어도 정겹기만 합니다.
강민숙 시인 /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