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2> 차, 홀로 즐기다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2> 차, 홀로 즐기다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1.01.1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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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으로 비치는 눈 덮인 차가운 풍경, 가지만 남은 검은색 겨울나무는 눈속에서 더욱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 덮인 겨울 산을 보고 있으면 맑고 향기로운 차 한잔이 생각난다. 절로 차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눈 녹인 물로 차를 달여 그 맛을 즐겼던 옛 선인들의 멋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시는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 권4에 실린 「행점 가는 길에 눈보라가 치다」라는 시이다.

 

  온갖 소리 부르짖어 성난 바람 몰아치니

  털모자 여우 갖옷은 물을 뿌린 듯하고,

  잠깐새에 눈보라가 공중을 휩싸니

  바다와 산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돌아가네.

 

  흐릿한 수레바퀴엔 긴 고드름 드리우고

  말굽은 옥잔 같고 갈기엔 구슬이 주렁주렁,

  구릉과 골짜기는 깎은 듯이 편평하여

  지척에서 넘어짐이 어이 그리 잦은고,

  평생 가장 좋아한 건 절집에서 잠잘 때인데

  송죽(松竹)엔 바람 불고 하늘엔 구름 가득할 제,

  화롯불에 얼굴 발갛게 비추며 차를 달여

  조금 마시고 모기 소리로 조용히 읊음일세.

 

  이런 낙(樂)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나뿐이니

  바위 골짝을 거닐며 늙는 것이 족하거늘,

  누가 멀리서 달려와 벼슬하길 권하였는가

  부디 세상의 벼슬살이 어려운 줄을 알아야 하리.

 

  1356년(공민왕) 중국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눈보라를 만나 폭설을 피해 절에서 차를 마시며 지은 시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온 세상이 깜깜해지고 수레바퀴에 눈이 고드름으로 변하고, 말굽은 옥잔처럼 얼고, 갈기엔 얼음 구슬이 달렸으니 얼마나 춥고 고생스러운 날씨였는지 짐작이 간다. 골짜기는 눈이 덮여 평지처럼 편평하고 사람들이 눈속에서 넘어지니 수레도 수레를 끄는 말도 사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날씨에 따뜻한 절간의 화롯불에 차를 달이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포근했던 것 같다. 차를 조금 마시고 누가 들을까 하여, 모기 소리 만큼이나 작고 조용하게 이런 낙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며 오붓한 시간을 즐긴다. 한적함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누가 멀리서 달려와 벼슬을 청하였는지, 고달프고 어려운 벼슬살이에서 잠시 안빈낙도를 꿈꾸며 눈보라 속에서 차 한잔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차 한잔이 족히 인생의 벼슬과도 바꿀만한가. 그런 것은 아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어 한잔의 차 맛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차는 일상(日常)에 있는 것이지 은거(隱居)에 있는 것은 아니다. 차는 한가할 때 마시는 것쯤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차의 맛을 음미하고 싶다면, 차를 마시기 전에 차의 종류를 선택해야 한다. 같은 종류의 차라도 생산지와 환경, 가공기술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 차의 종류와 성질을 알아야 차를 우리는 온도와 다구를 선택하고 색과 향기와 맛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를 매일 마신다면 아침에 마신 차는 하루의 에너지를 주고, 점심에 마시는 한 잔은 마음을 가볍게 하여 일을 즐겁게 할 것이며 오후에 마시는 한 잔의 차는 피로를 풀어줄 것이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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