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학기행] 20. 추억만이 철로를 달리는 구 남원역 승강장 - 윤수하 시인 ‘원다방 골목’
[전북문학기행] 20. 추억만이 철로를 달리는 구 남원역 승강장 - 윤수하 시인 ‘원다방 골목’
  • 이휘빈 기자
  • 승인 2021.01.10 15: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원시 동충동에 위치한 옛 남원역은 1931년부터 2004년 8월까지 운영됐다. /이휘빈 기자

 아침 햇살 아래 구 남원역은 고요했다. 남원시 동충동에 있는 구 남원역의 광장은 이제 버스들이 머무는 차고지다. 1931년 전라선이 개통한 이후 2004년 8월까지 구 남원역은 전라선의 한가운데서 승객들을 맞이하고 배웅했다. 이제 텅 빈 승강장에는 눈 속에 묻힌 철로와 갈색빛으로 잠든 식물들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지평선 너머는 하얀 침묵이 빛났고 산비둘기들이 철로에서 종종거렸다. 열차의 모습은 설원 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므로, 이제 구 남원역은 누군가를 배웅하거나 배웅을 받은 이들에게만 추억이 유효했다.

 이 추억의 흔적은 윤수하 시인의 시집 ‘틈’에 실린 ‘원다방 골목’을 읽어야 짐작할 수 있다. 윤수하 시인은 시에서 다방과 사람들의 모습을 B4연필의 세밀화마냥 다방 속 모습을 새겼다. 시 첫줄은 ‘몇 푼만 생기면 여수행 비둘기호를 타고’로 시작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새벽’이라는 문장은 다시 구 남원역을 마주해야 함을 상기한다.

구 남원역사는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이휘빈 기자
구 남원역사는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이휘빈 기자

 ‘다방 안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은 / 각자 그들의 종착지로 떠나야 했다. / 떠도는 자들의 달콤한 휴식과//엿볼 수 없는 집 뜰에서 / 돌담 밖으로 새어 나온 라일락 가지에 / 막 물오르는 꽃봉오리를 보며 /나는 영영 떠날 수 없으리라 했으나’ 라는 연과 행에서 시인은 졸고 있는 사람들의 종착지를, 그리고 돌담 밖 라일락 가지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돌아온 사람의 모습을 아우렀다.

 이 시인은 시에 대해 당시 실제로 존재하던 다방과 그 풍경에 관한 얘기라고 말했다. 시인은 “역에 왔다가 비둘기호 기차를 기다리며 밤을 새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밤새도록 운영하는 다방이었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다방 안에서 잠도 자고 신문도 읽던 풍경이 있었다” 라며 “타인을 위해 공간을 내어주는 주인집 내외에게는 사법고시 패스한 자랑스러운 아들들이 있어서 당시 유행하던 레지 장사를 하지 않았다”고 추억을 얘기했다.

 시인이 구 남원역과 그 인근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첫눈집’, ‘타오르는 탑’ 등이 있다. 시인은 “특정한 순간이 떠오를 때면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없는 ‘장소의 부재’는 아쉽고 허전하다”며 “남원역 앞의 원다방, 우체국 근처의 막걸리집들, 그 풍경들 모두 젊었을 적 추억들이 어린 곳이다”라고 전했다.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북의 모습들은 다양했다. 그 중 하나가 ‘간이역’이었다. 시인은 “간이역 대합실에 모여 앉았던 사람들과 기차 불빛, 비둘기호의 풍경, 역과 역을 오가며 일을 하거나 통학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센과 치히로의 모험’의 다른 세계 기차 풍경처럼 아련하고 꿈속 같다. 기차는 인생의 여정처럼 아련하다”라고 말했다.

 시인의 설명을 되새기며 역 밖으로 나오니 길 건너 다방에는 ‘임대’가 붙어있고, 뒤돌아보니 버스들은 여전히 우두커니로 있었다.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라는 구 남원역, 추억을 품은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종착역이 붙어있지 않은 비둘기호가 지평선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휘빈 기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