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 땅에 묻힌 애국지사 홍범도 장군 유해송환 서두르자
이국 땅에 묻힌 애국지사 홍범도 장군 유해송환 서두르자
  • 홍성임 전북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 의원
  • 승인 2020.12.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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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6ㆍ25전쟁 70주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등 다양한 주년(週年)을 맞았으나, 무엇보다 ‘항일독립전쟁 최초의 승리’ 봉오동ㆍ청산리 전투 승전 100주년을 맞은 해이기에 더욱 뜻깊다.

 1920년 6월 중국 길림성 봉오동 계곡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와 일본 정규군 ‘월강추격대’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상해임시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0여 명ㆍ중상 200여 명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ㆍ중상 2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기세는 10월 1,500여 명의 독립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 청산리 전투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에 비해 매우 열악했던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빛나는 전술의 힘이 컸다. 당시 일본군은 지형지물 및 기후조건을 이용한 독립군의 전술에 완전히 놀아나 서로 총을 겨누고 발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험준한 골짜기로 유인해 선제 총공격을 감행한 독립군에 섬멸당했다.

 그리고 이 모든 중심에는 여천(汝千)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는 여타 의병장과의 비교가 불가할 만큼 매우 비범하다. 본래 산짐승들을 사냥하던 포수 출신인 홍범도 장군은 1895년 을미의병을 계기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사냥을 그만둘 당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후 그간의 무훈을 바탕으로 1921년 창설한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가 되고, 독립군 최초로 소련의 트로츠키, 레닌과 단독 면담하는 등 평민 출신으로서는 굉장히 입지전적인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의 말로는 화려한 투쟁 경력에 비해 다소 초라했다. 공산주의 독립 운동 단체와의 인연을 계기로 소련으로 활동지를 옮긴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현 카자흐스탄 땅으로 강제 이주됐고, 1940년대 초까지 공장노동자로 생활하다 1943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리고 사후에는 공산당 활동에만 초점이 집중돼 ‘공산주의자’라는 이념 논란이 지속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전기(傳記)란 화려함의 기억이라고 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 필자가 강단에서 역사 강의를 하던 시절 홍범도 장군에 관해 물으면 ‘백발백중 홍장군’ ,‘나르는 홍범도’ 등 화려한 수식어는 들려왔지만, 그 씁쓸한 말로를 알고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일까.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여전히 카자흐스탄 땅에 잠들어 있다. 1962년 10월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것이 무색할 정도다.

 지난 1991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해봉환을 추진한 적 있으나, 홍범도 장군의 출생지가 평양이라는 것을 이유로 남북한대사관 간의 거센 외교전이 일어나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여전히 카자흐스탄 묘역에 있다.

 다만 지난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스흐탄 국빈방문을 계기로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을 카자스흐탄 토카예프 대통령과 합의했으니 매우 긍정적이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다소 지연되고 있지만, 상황이 잠잠해지는 대로 하루빨리 송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씨는 ‘외할아버지를 한국에 모시는게 마지막 꿈’이라고 밝혔다. 차일피일 미뤄지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관계부처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향후 있을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 기념식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영식과 함께 진행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홍성임 <전라북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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