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역사에 숨어 있는 삶의 이야기
선거역사에 숨어 있는 삶의 이야기
  • 이용섭 전북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 승인 2020.12.2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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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질 녘이면 집을 나간 아이들이 집을 찾아 들어오듯이 한 해를 마무리할 때가 되면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난날들의 기억도 하나 둘 날을 세우고 일어선다. 선거관리를 30년 넘게 했으니 이맘때 선거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선거역사에도 그 시대의 생활과 삶이 그대로 녹아있고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생겨나지 않았으며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옛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선거에 있어 작지만 꼭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있다. 바로 기표봉이다. 1948년 5월 10일 처음 이 땅에 선거가 치러졌다.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안되던 시절이었으니 기표봉인들 제대로 구할 수 있었겠는가? 동그라미로 표시될 수 있는 것이면 되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이용했다. 한국전쟁 시절과 전쟁이 끝난 후에는 탄피가 사용되었는데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기표봉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970년대 플라스틱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요즘 학교 앞 문방구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볼펜 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생활의 지혜가 아니었나 싶다. 1985년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통일된 동그란 플라스틱 기표봉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선거구마다 천차만별이었고 동그라미 형태만 띠면 되었다. 선거가 시작된 지 40년 만의 일이었다. 그만큼 먹고살기가 나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92년 대통령선거 때 기표봉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동그라미 표시를 한 투표지를 접었을 때 인주가 다른 곳에도 그대로 복사되어 유권자가 어느 후보자에게 투표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동그라미 안에 ‘人’을 새겨 넣었다. 문제가 발생했다. 때마침 김영삼 후보자가 출마를 하게 되었는데 동그라미 안에 ‘人’은 ‘○과 人’으로 ‘영삼’의 초성을 의미하고 있어 김영삼 후보자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기표봉은 또 바뀌는 운명이 되었다. ‘人’에서 “卜”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똑 같은 기표봉을 보고 사람에 따라 생각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기표봉은 또 마술을 부리며 마지막 변신을 시도한다. 기표를 할 때마다 찍었던 인주를 없앤 것이다. 기표소에 놓여 있는 기표봉을 투표용지에 찍기만 하면 인주가 자동으로 나오니 참 편리한 것이다. 그래서 만년기표봉이라고 불렸다.

 나무막대기에서 만년기표봉까지 70년이 넘는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中.)’ 이 시구가 기표봉의 삶에도 있다.

 옛날에 현자와 어린 제자가 있었다. 현자가 마당에 큰 원을 그려놓고 제자를 불렀다. “내가 저녁에 돌아왔을 때 원안에 있으면 저녁을 굶길 것이고 원밖에 있으면 내쫓을 것이다.” 라고 말한 후 출타를 했다. 저녁에 현자가 돌아왔음에도 그 제자는 저녁을 굶지도 쫓겨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현자가 그려놓은 원을 빗자루로 쓸어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빗자루로 원을 지워버리듯 이제 기표봉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워야 할 때가 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개발한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 투표시스템이 기표봉 없는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비우면 채워진다는 게 진리인가 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정치·사회적 합의를 통해 제도화하고 새 역사를 쓰는 것이다.

 이용섭<전북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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