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하자”
“법대로 하자”
  •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 승인 2020.12.1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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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와 놀이터에 갔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말다툼을 하고 있다. ‘분쟁’의 한복판에서 먹고 사는 업을 하다 보니 일상의 다툼에 되도록 개입하고 싶지 않았지만 열린 귀를 막을 순 없다. 아이들은 실컷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다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말미에 말한다. “야. 법대로 하자.”

 사람들 사이의 다툼으로 먹고 사는 변호사 입장에서 겸연쩍긴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을 법대로 한다면 몹시 피곤할 것이다. 예로부터 ‘법대로’ 하는 일은 좋은 일이 되지 못했다. 조선시대 선비가 해서는 안되는 일로 송사(訟事)가 꼽히는 것도 법적 분쟁절차의 고단함과 필연적으로 분쟁절차에서 발생하는 점잖지 못한(?)일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신년운세를 볼 때도 몸이 아프거나 구설에 오르는 일과 송사에 휘말린다는 얘기는 동급으로 취급된다.

 민사소송 도중 진행되는 조정절차에서 조정위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가장 훌륭한 판결보다 불만족스러운 조정이 낫다.’ 조정은 원고와 피고 사이에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소송절차 내에서 화해를 하는 절차를 말한다. 조정실에서 나오는 당사자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하지만,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기나긴 송사에 받을 스트레스와 각종 비용을 감안하면 그렇다. 애초에 서로 좋게 해결했으면 됐을 일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말이 들어맞는 경우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 국가는 법치주의의 기둥 위에 서 있다. 법치주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로 표현된다. 반면 법치주의의 외피를 썼지만, 실질은 독재자나 특정 이익집단의 도구로 법을 이용하는 지배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라고 한다. 후자의 대표적 예는 나치 독일이다. 법의 지배에 대해 냉소적으로 소수 엘리트 집단인 법률가들의 지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에 태생적으로 내재한 중우정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법의 지배는 필수적인 원리다. 심지어 사법부가 정치적 목표나 사회적 정의 실현의 적극적 법형성 내지 법 창조를 해야 한다는 사법적극주의(judicial activism)적 입장도 있다.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원리라고 하더라도, 법 또한 민주주의 아래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대의제에 직접 종속되는 입법부, 수반을 선출함으로써 간접 통제되는 행정부에 비하여 사법부는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요즈음 시끄러운 검찰도 마찬가지다. 법무부에 내청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실질은 검찰 자신들의 표현대로 ‘준사법기관’이다.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법의 지배에 대하여 ‘법의 제정, 법의 운용과 평결이 얼마나 사회적 힘의 관계를 공정하게 반영하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결국 민주사회의 첨예한 분쟁을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해결하는 일은 사법부의 몫이며, 판단의 준거는 공정성이란 얘기다.

 최근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송사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좋지 않다. 5선의 국회의원, 여당의 당대표를 지낸 관록의 정치인 출신 장관의 정치력은 보이지 않는다. 헌법을 좋아해서 말끝마다 헌법을 레퍼런스로 하는, 조만간 정치를 할 것으로 보이는 예비정치인 총장의 송사 제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국가의 통치행위와 모든 정치적 다툼을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것을 법의 지배라고 볼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장관과 총장이 놀이터의 아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나영주<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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