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석 전북도 보건의료과장 “마스크 착용 개인방역 수칙 잘 지키는게 최대의 예방”
강영석 전북도 보건의료과장 “마스크 착용 개인방역 수칙 잘 지키는게 최대의 예방”
  • 김혜지 기자
  • 승인 2020.12.07 19: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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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말 전북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후 바이러스 전염 공포가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전북도 방역당국은 매일 도내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현황을 수시로 확인하고, 방역 수칙 준수를 당부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역학조사, 감염병대응, 응급의료 등 각 팀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보건 전반을 진두지휘하는 이가 있다. 강영석 전북도 보건의료과장 이야기다.

“‘전북의 정은경’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니, “그런 말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외모만 보면 뚜렷한 이목구비와 듬직한 체격 때문에 ‘강인함’ 혹은 ‘냉철함’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매일 극존칭어를 가득 담아 느리고 일정한 톤으로 현 상황을 설명한다. ‘선함’, ‘배려심’ 등의 부드러운 단어가 더 제격이다.

최근 들어 도내에서 하루에 수십명의 확진자가 쏟아지는 이례적인 상황에도 역시나, 그는 허둥대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한다. 눈 코틀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틈을 비집고, 잠시나마 그의 일상을 들여다봤다./편집자 주
 

-하루일과가 어떻게 되나?

새벽 5시 반, 알람 소리에 깬다.

보건환경연구원에서 검체 채취한 것 중에 양성 판정을 받은 확진자가 몇 명인지 팀장에게 수시로 보고가 온다. 역학조사팀이 확진자와 통화하면서 언제 증상이 발현됐고, 방문지 등을 파악하는 작업을 한다. 기본적인 조사가 마무리돼 보고가 들어오면 보충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보고 보완작업을 한다. 오전에 이런 작업들이 마무리되면 오전 10시 30분쯤 언론 브리핑을 한다. 이후에 잠깐 시간이 나면 정신을 깨기 위해 커피 한 잔씩 마신다.

오후에도 비슷한 일과를 보내다가 해가 지면 한 번씩 창밖을 본다. 전북도청이 젊은이들이 몰리는 전주 신시가지 복판에 있지 않나. 거리가 매우 화려하다. 마스크 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면 밉기도 하지만, 그에 비해 확진자는 또 적게 나오니까 그걸로 위안 삼고 있다.

확진자가 적을 땐 새벽 1시쯤 귀가했는데 요즘처럼 확진자가 많을 때에는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깔고 침낭 속에서 잔다. 바쁠 때는 날밤을 새기도 하고, 2시간 정도 잘 때도 있다. 피곤하더라도 야영하는 기분도 들고 나름 재밌게 지내고 있다.

-종종 민원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를 하시는데

확진자가 타지역에 비해 적다 보니 본인에게 부여된 ‘몇 번째 확진자’에 대해 늘 기사화가 됐다. 입원치료를 받으면서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기도 하고, 지인들이 어떻게 알고 확진자에게 전화해서 상처주는 말을 하기도 하나보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는 등의 말을 들으면 두 번 상처가 되는 거다.

그럴 때 일부 확진자들이 “본인이라고 드러날 만한 정보를 도청에서 공개하거나 흘린 것 아니냐”고 항의전화가 올 때가 있다. 그런 얘길 들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또 확진자가 다녀간 음식점이나 가게 명이 공개되면 그로 인한 피해를 입은 업주들도 하소연할 때도 많다.

어떤 분들은 마스크 안 쓴 사람을 보면 못 견뎌 하는 분들이 전화해서 ‘왜 단속 안 하느냐’고 따져 묻기도 하신다.

일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저는 그래도 언론에 자주 나오다 보니까 인지도가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함부로 대하시는 분은 없는데 제 동료들은 심한 욕설을 듣기도, 협박 전화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때 같이 울어주면서 위로해준다.
 

-사무실 책상 위에 ‘벌금 1000원’ 상자가 있다.

동료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 고 이야기 한다.

사람은 믿는데 바이러스는 믿을 수 없지 않은가. 무증상에도 소리없이 전파가 되다 보니까 우리부터 잘하자는 차원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 천원씩 내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모인 돈은 ‘0원’이다.

 

-‘최선으로 대응하는데 최악으로 향한다.’ 최근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가 바뀌었다.

현재 심정이다. 매일 ‘개인 방역밖에 답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방역 수칙을 지켜줄 것을 안내하고 있지만, 확진자는 쏟아진다. 제가 손을 쓸 수 없는 부분이다 보니,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근 방송 인터뷰에서도 내내 마스크를 쓰고 했다.

숨도 차고 불편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코로나는 영영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것 같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역지사지’다. 입장을 바꾸고 생각해보면 쉽게 일이 풀리는 것 같다. 내가 먼저 잘하면 상대방도 기분 좋게 한다. 어릴 때부터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매일 언론브리핑을 한다. 사람들이 알아볼 것 같다.

도민들이 지나가다가 한 번씩 돌아보신다. 보건의료 쪽에서는 누군지 아니까 출장 가서 관계자들을 만나면 사진 찍자고 한다. 그럴 때마다 쑥스럽다. 무엇보다도 제 동료들이 더 많이 고생하는데 나만 조명받는 것 같아서 미안한마음이 든다.

때때로 단순작업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하지 않나. 다른 일로 넘어가야 일이 끝났다는 기분이 들 텐데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니까 동료들 모두 지쳐 있는 상태다.
 

-가족들, 주변 지인들도 걱정이 많을텐데.

가족들은 나의 역할이 뭔지 알기 때문에 이해해주고 응원해준다.

방송에 자주 나오다 보니 그동안 연락 끊겼던 친구들도 ‘고생 많다’며 응원메시지를 전한다. 안타까운 건 친구들은 꼭 한 잔 하고 있을 때 전화를 하는 것 같다.

이미 술자리가 한창인 상황인 것 같은데 정색하면서 그만 집에 가라고 할 수도 없고, 고맙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속이 터진다.(웃음)

 

-취미가 뭔가.

완전 이과생이라 문학은 멀리한다. 수학, 과학을 좋아해서 가끔 중3인 큰 아이랑 수학문제 풀기 시합을 한다.

그러면서 스트레스 풀기도 하고, 시간을 보낸다. 요즘엔 아이들이 사춘기여서 대화할 기회가 적다.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한다. 기독교인이라 CCM도 자주 듣고, 요즘 유행인 트로트도 좋아한다.

어릴 때는 팝송을 자주 들었는데 그룹 ‘저니(journey)’, ‘스콜피언스(Scorpions)’ 음악 자주 들었다. 지금 벨소리도 스콜피언스의 ‘always somewhere’이다.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못 보다가 지난달 확진세가 누그러졌을 때 ‘담보’라는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는데 300석 규모 상영관에 10명의 관람객이 있었다. 모두 마스크 잘 쓰고, 거리두기 한 상태로 함께 봤다. 영화는 너무 슬퍼서 보는 내내 펑펑 울었다.

 

-혹시 별명이 있는지.

어렸을 때는 ‘큰 두부’라고 불렸다. 4남매 중 첫째인데 아버지가 김제에서 두부공장을 하셨었다. 동네 사람들이 ‘두부집 큰아들’이라고 그렇게 부른 것이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키가 크다고 전봇대, 빼빼하다고 ‘빼빼’라고 불렀다. 지금 키(180cm)가 중 3때 키다.

고등학교 때는 만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캐릭터 ‘폴’하고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코로나 사태, 언제 끝이 날까.

백신 치료제가 나오고 나서도 안정화가 되려면 그 후로 반년은 더 지속할 것 같다. 이것도 우리나라처럼 관리가 되는 상황이라는 게 전제가 돼야 한다. 그런데 미국이나 서부유럽은 감당이 안 될 수준이지 않은가. 결국 1년 이상은 걸릴 거라고 본다.

백신 주사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접종 대상자에 대한 우선순위가 있을 테고 또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내년 중반쯤 되면 접종자도 많아지고 바이러스 전파도 사그라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있다.

 

-의대 졸업 후 왜 공무원이 됐나.

원래 고등학교 때는 비행기를 설계하는 항공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고2 때 시험을 잘 봤던 데도 점수를 낮게 받는 일이 있었다. ‘보충수업을 하지 않는다’고 친구들을 선동(?)했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때 당시에는 선생님 주관에 따라 성적이 좌우되는 게 가능했던 시절이어서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놨고, 점수대에 맞춰서 도내 한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그래서 군대로 도망(?)을 갔다. 27살 말에 육군 병장을 제대하고, 28살에 전주 한 재수학원에서 공부해서 29살에 늦깎이 의대생이 됐다. 항공공학자 꿈은 계속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의대를 택했다.

그런데 나이 어린 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해보니까 확실히 힘이 부치더라. 인턴, 내과 레지던트를 하면서 환자를 대하고 진료를 보는 게 나에게는 잘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지던트 1년까지만 수료하고, 김제시보건소에서 관리의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도청으로 온 지는 4년 좀 넘었다. 지금은 아주 만족한다.

-코로나 끝나면 뭘 가장 하고 싶나.

약속, 모임 자제하라고 매일 같이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지인과 약속을 잡은 지도 오래됐다. 술을 잘하는 건 아니지만 ‘1차’는 좋아한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가볍게 맥주 한 잔 하고 싶다. 

 

-도민들, 현장공무원에게 한 말씀.

최근에 비록 상황이 악화됐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도민들께서 방역수칙을 잘 지켜주셨다. 그 결과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난 수준의 보건위기상황이다. 환자들을 모실 병상이 부족한 상황까지 와버렸다. 이제는 개인의 건강을 넘어 공동체 안녕을 생각해야 할 때다. 우리나라 국민은 과거에도 위기 사태 때 자신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극복해왔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일선에서 애쓰는 공무원들에게도 응원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고단한 업무에 지치고, 때로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꿋꿋하게 버티셨으면 한다. 저는 힘겨울 때 ‘동료애’와 ‘공심’을 떠올린다. 함께 하고 있는 동료를 생각하고, 국민을 섬기는 공무원의 자세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인다면 이 위기도 극복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 강영석 전북도 보건의료과장은

1987년 전주고 졸
2002년 전북대 의대 졸
2004년 ~ 2016년 8월 김제시보건소 관리의사
2016년 8월 ~ 2017년 4월 도 역학조사관
2017년 4월 13일 ~ 현재 전북도 보건의료과장

김혜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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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호 2020-12-07 20:50:43
티비에서 비춰진 모습과 다르네요.
인간적인 모습에 더 믿음이감니다
좀만 더 고생해주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