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 학생 독립운동가 윤창하 선생
12월의 독립운동가 - 학생 독립운동가 윤창하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0.11.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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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맞서 싸운 학생 독립운동가 -  

윤창하 선생
윤창하 선생

1920년 당시 일제가 학생들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학교교육을 철저히 통제하고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의 항쟁의식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는데,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 박기옥(朴己玉)을 밀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를 발단으로 하여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학생들은 검거된 광주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대한독립 만세”, “피압박 민족해방 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쟁하였는데 국내외에 걸쳐 최소한 300개 이상의 학교에서 5만 4천여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크게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운동이었으며 학내문제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교육문제,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에서 나아가 민족독립, 민족해방을 제기한 총체적 민족운동이었다. 또한 1920년대에 축적된 민족역량을 전국 규모로 분출했다는 점에서 국내 민족운동의 역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윤창하 선생은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의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독서회 중앙부와 광주고보 독서회의 간부로 활동하며 독서회의 활성화와 민족해방운동의 방안을 고민하였다.

11월 3일로 체포되어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시위운동으로 금고 4월에 집행유예 5년,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독서회 활동으로 징역 2년을 각각 언도받았다. 두 번째 판결로 인해 앞의 집행유예 판결이 취소되어 총 2년 4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일제강점기나 광복 이후에도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84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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